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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그저께, 민족영웅 윤봉길 의사 탄신일이었습니다

"중국 100만 군대가 못한 일을 조선의 청년 한 명이 해냈다" - 중국 장개석 총통의 극찬

2014.06.23(월) 02:46:46 | 임정화 (이메일주소:dsfjkjfsjf@hanmail.net
               	dsfjkjfsjf@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중국 백만 군대가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젊은이가 능히 했으니 장하다.”
지난 1932년 4월 29일, 중국의 상하이 홍커우 공원(현재의 루쉰 공원)에서 우리 강토를 유린한 일본군 심장부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사령관 시라카와 육군 대장 등을 폭살하는 의거를 일으킨 ‘민족영웅’ 윤봉길 의사.
위에 한 말은 당시 중국의 장개석 총통이 윤봉길 의사의 쾌거를 칭송하며 한 말이었습니다.
 
엊그제 6월 21일은 윤봉길 의사가 탄생하신(1908년) 106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다들 모르셨죠?
 
예산에서 태어나 어릴 때는 천재라는 소리까지 들었던 젊은 청년 당신이 빼앗긴 나라를 구하고자 분연히 일어섰던 출생지에서 다시금 감사한 마음과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생가와 기념관을 찾았습니다.

의사께서는 먼저 고향에서 농촌계몽의 첫 시도로 문맹퇴치운동을 생각하고 사랑방에 야학을 개설했습니다. 이곳에서 한글, 역사, 산술, 과학, 농사지식 등을 가르쳤으며 자신의 체험과 지식을 총동원해 3편으로 된 농민독본을 저술했다죠.

1928년에는 증산운동, 구매조합조직, 토산품애용, 부업장려를 통해 마을을 부흥시키기 위한 운동단체인 부흥원을 조직했습니다. 또한 독서회를 조직하고 계몽강연회와 토론회도 계속 열었다 합니다.

1929년에는 상부상조를 목표로 한 위친계를 조직했으며, 이어 자급자족을 목표로 한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는 등 의거를 일으키기 전까지 농촌에서 상당한 선구자적 계몽활동을 펼치셨습니다.
 
하지만 고향에서 계몽운동을 하는 것만으로는 일제의 탄압에 대한 울분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독립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던 의사께서는 "丈夫出家生不還(장부출가생환불)” - 대장부가 집을 나가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 라는 비장한 글을 남기고 중국으로 망명의 길에 올랐습니다.
 
중국에 간 윤봉길 의사께서 일본군을 폭살시킨 의거를 일으키기 전, 1932년 1월에 먼저 이봉창 의사가 도쿄에서 히로히토 일왕이 탄 마차에 수류탄을 던지는 의거를 일으켰죠.

하지만 당시 여러 대의 마차 중에서 일왕이 탄 마차가 어느 것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 의거는 실패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고 결국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부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몸담고 기회를 노리던 의사께서는 김구 선생과 함께 거사를 계획한 뒤 도시락과 물통 폭탄을 사전에 준비했습니다.

당시 윤 의사는 폭탄을 받고 기념 촬영을 한 뒤 6원짜리 시계를 2원짜리였던 김구 선생의 시계와 바꾸며 “이제 앞으로 제 시계는 몇 시간밖에 더 쓸 일이 없습니다" 라고 말해 주위를 숙연하게 했다고 합니다.

드디어 1932년 4월 29일.
그날이 밝았습니다.
 
“새벽에 윤 군과 같이 김해산의 집에서 마지막 식탁을 같이하여 아침밥을 먹으면서 윤 군의 기색을 살펴보았는데 그는 무척 태연자약하다. 김해산 군은 윤 군의 이런 태도를 보고, 나에게 조용히 권고를 한다. “선생님, 지금 상하이에서 우리의 활동이 있어야 민족적 체면을 보전하게 되는 이때에 윤 군을 구태여 다른 곳에 보내려 하십니까?” 나는 두리뭉실 대답할 뿐이었다. 그를 떠나보내며 나는 목멘 소리로 말했다. “훗날 지하에서 만납시다.”
- (김구의 ‘백범일지’ 중에서)
의사의 의거가 있기 직전, 김구 선생이 당시의 일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이날 오전 11시 40분경 일본군이 일왕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예포를 발사하는 와중에 윤 의사는 물통 폭탄을 시라카와 사령관에게, 도시락 폭탄을 상하이 일본 거류민 단장에게 던졌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요.
폭탄의 대폭발과 함께 시라카와 사령관과 거류민 단장이 현장에서 즉살됐고 3함대 사령관과 일본 공사가 중상을 입어 불구가 되었습니다. 그 외 중요 인물들에게 중상을 입혔습니다.

의사께서는 의거 직후 목청껏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고 곧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그 후 형식적 절차의 재판을 거쳐 의사께서는 12월에 사형을 당하시며 장렬하게 순국하셨습니다.

이에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이 의거에 감명을 받아 “우리 군사 100만명이 못 해낸 일을 한 명의 조선 사람이 해냈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그 후 중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당신께서 태어나신 106년전 오늘, 1908년 6월 21일만큼은 우리 모두가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이날만큼은 단 하루라도 불멸의 길을 가신 윤봉길의사의 의거정신을 우리 모두 기억했으면 하는 마음에 당신의 탄신일에 이렇게 숭모의 마음으로 글을 적습니다.


윤의사 사당 앞

▲ 윤의사 사당 앞


충의사 입구

▲ 충의문 입구


숭모관

▲ 의사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는 충의사


의사의 초상화

▲ 의사의 초상화


건너편 부인 배향순 여사의 묘

▲ 건너편 부인 배향순 여사의 묘역


배향순 여사의 묘

▲ 배향순 여사의 묘


기념관

▲ 기념관


의사께서 아우에게 가르치던 명심보감

▲ 의사께서 아우에게 가르치던 명심보감


의사께서 사용하신 놋쇠 그릇 등 식기

▲ 의사께서 사용하신 놋쇠 그릇 등 식기


의사께서 지은 한시를 모은 '순운대편'

▲ 의사께서 지은 한시를 모은 '순운대편' 한시집


의사께서 조직한 월진회 깃발

▲ 의사께서 조직한 월진회 깃발


의사께서 야학을 위해 직접 저술한 '농민독본'

▲ 의사께서 야학을 위해 직접 저술한 '농민독본'


의사께서 어머니께 쓴 편짓글중 일부

▲ 의사께서 어머니께 쓴 편짓글중 일부


의사께서 중국으로 떠나기 전 집에 남긴 글.

▲ 의사께서 중국으로 떠나기 전 집에 남긴 글. "丈夫出家生不還(장부출가생환불)” - 대장부가 집을 나가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김구 선생과 함께 의거 준비를 협의한 흥륜다원

▲ 김구 선생과 함께 의거 준비를 협의한 흥륜다원


한인애국단 입단 직후 태극기 앞에서 선 윤의사. 양 손에 쥔 수류탄과 권총에 민족을 구하겠다는 일념이 살아 숨쉬는 듯...

▲ 한인애국단 입단 직후 태극기 앞에서 선 윤의사.


한인

▲ 양 손에 쥔 수류탄과 권총에 민족을 구하겠다는 일념이 살아 숨쉬는 듯...


거사 직전 윤의사께서 김구선생에게 건넨 회중시계

▲ 거사 직전 윤의사께서 김구선생에게 건넨 회중시계


의사께서 거사에 쓴 도시락 폭탄과 물통폭탄

▲ 의사께서 거사에 쓴 도시락 폭탄과 물통폭탄


거사 현장 미니어처

▲ 거사 현장 미니어처


거사 직후 연행되시는 모습

▲ 거사 직후 연행되시는 모습


그저께민족영웅윤봉길의사탄신일이었습니다 1


순국 당시 묶이셨던 형틀대 기둥.

▲ 순국 당시 묶이셨던 형틀대 기둥.


장개석이 보내온 서한과 사진

▲ 장개석이 보내온 서한과 사진


기념관 야외의 동상

▲ 기념관 야외의 동상


멀리서 본 저한당(?韓堂). “한국을 건져내는 집”이라는 뜻으로 윤봉길 의사가 직접 당호를 지어 붙인 이 옛집은 윤봉길 의사가 네살 때부터 1930년 봄 중국으로 망명하기까지 살던 집입니다.

▲ 멀리서 본 저한당. “한국을 건져내는 집”이라는 뜻으로 윤봉길 의사가 직접 당호를 지어 붙인 이 옛집은 윤봉길 의사가 네살 때부터 1930년 봄 중국으로 망명하기까지 살던 집입니다.

 

저한당 안채

▲ 저한당 안채


의사께서 농촌계몽운동을 펼치던 저한당 야학방

▲ 의사께서 농촌계몽운동을 펼치던 저한당 야학방
 

 

도중도(島中島). 두 물길이 만나서 배 모양의 작은 섬을 만들어 낸 곳으로 윤의사께서 태어나신 궝현당을 품고있는 생가지입니다. 윤의사가 이곳을 한반도 가운데의 섬으로 일본군이 발을 들여놓지 못할 섬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윤봉길의 증조부인 윤재가 정착한 땅으로 풍수가들은 큰 인물이 날 자리라고 풀이하였답니다.

▲ 도중도(島中島). 두 물길이 만나서 배 모양의 작은 섬을 만들어 낸 곳으로 윤의사께서 태어나신 권현당을 품고있는 생가지입니다. 윤의사가 이곳을 한반도 가운데의 섬으로 일본군이 발을 들여놓지 못할 섬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윤봉길의 증조부인 윤재가 정착한 땅으로 풍수가들은 큰 인물이 날 자리라고 풀이하였답니다.
 

광현당(光顯堂). 도중도 내에 있으며 윤의사가 태어난 집입니다.

▲ 광현당(光顯堂). 도중도 내에 있으며 윤의사가 태어난 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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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흥원(復興院). 이곳은 윤의사께서 1928년(21세때) 창설하여 야학회, 월진회 등 온갖 농촌계몽운동을 벌이셨던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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