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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요즘 뜨는 최고영화 '역린'과 함께 보는 정순왕후 생가

2014.05.21(수) 16:24:07 | 오수금 (이메일주소:sjhdk334@hanmail.net
               	sjhdk334@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영화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 아주 흥미진진 합니다.
원래 영화든 소설이든 그것의 소재가 팩트(사실, 진실)을 기본으로 한 거라고 하면 그 흡입력은 상당하죠.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나 소설은 그래서 아주 큰 폭발력과 대단한 인기를 얻습니다.
 
오늘 제가 말하려고 하는 영화는 군대에서 제대한 후 첫 영화에 출연한 인기 배우 현빈이 주연한 ‘역린’이라는 영화입니다.

영화 역린을 말하고자 하는 이유 역시 충청남도 서산에 있는 ‘정순왕후 생가’를 소개하기 위함인데 정순왕후 생가를 소개하기 위해서는 영화 역린부터 이야기 하면 아주 재미있을것 같아서요.
 
영화를 보면 정조를 암살하려는 끊임없는 시도가 나오는데 그 뒤에 강력한 배후가 바로 정순왕후입니다.

정조임금이 할마마마라고 부르는 이분은 영조의 계비입니다. 즉 영조의 정비이자 사도세자의 친어머니였던 정성왕후가 죽은 뒤 새로 왕비로 책봉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영조가 워낙 늦게 얻은 왕비여서 정조보다 나이가 겨우 7살밖에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조대왕의 할아버지인 영조의 부인이었으니 비록 7살 밖에 차이가 안나도 할머니는 할머니인 셈이죠.
 
그런데 이 정순왕후가 정조의 아버지였던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놓고 죽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죠. 그후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를 미워하게 되고 서로간에 사이가 좋을리 만무였습니다.
 
나중에 정조가 젊은 나이에 죽은 것도 결국은 그런 쪽의 누군가에 의한 암살이었다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되는 단초를 제공했죠. 물론 역사적 근거는 없습니다.
 
어쨌거나 정순왕후와 정조의 관계는 이렇게 끊임 없는 갈등과 긴장의 연속이었고 그런 과정을 통해 정조가 왕위를 지켜내는 것을 그린 영화가 지금 인기리에 상영중인 ‘역린’이라는 작품입니다.
 
영조와 정순왕후, 정순왕후와 사도세자, 정순왕후와 정조 사이의 갈등구조와 역사적 팩트를 얽어서 이해를 하면 영화도 재미있고 우리의 역사도 한층 흥미진진해 집니다.
영화속의 정순왕후는 젊음 여배우 한지민이 나와서 열연중입니다.
 
어쨌든 역사는 흘렀고 지금은 2014년입니다. 그래서 누굴 미워하고 욕하거나 갈등을 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가 아닌 이상요. 정순왕후도 결국 영조의 부인이자 조선 국왕의 왕비였으니까요.
 

정순왕후 생가 앞뜰

▲ 정순왕후 생가 앞뜰


생가 앞 비문

▲ 생가 앞 비문


이곳이 독립유공자터였다고 합니다

▲ 이곳이 독립유공자 김용환 지사의 묘터였다고 합니다


요즘뜨는최고영화역린과함께보는정순왕후생가 1

 

요즘뜨는최고영화역린과함께보는정순왕후생가 2
 


생가 앞에서 본 장면

▲ 생가 앞에서 본 장면


요즘뜨는최고영화역린과함께보는정순왕후생가 3


요즘뜨는최고영화역린과함께보는정순왕후생가 4


생가 안 편액

▲ 생가 안 편액


생가 내 화단

▲ 생가 내 화단


요즘뜨는최고영화역린과함께보는정순왕후생가 5


요즘뜨는최고영화역린과함께보는정순왕후생가 6


요즘뜨는최고영화역린과함께보는정순왕후생가 7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에는 정순왕후 생가가 있습니다.
몇백년된 고택을 대할 때면 무슨 보물을 감상하는 것 같이 묘한 흥분이 생기면서 주춧돌에서부터 기와지붕까지 심지어 마루 바닥까지 살펴보며 그 집만의 숨겨져 있는 독특한 아름다운 부분을 찾으려고 돌아 다닙니다.
 
그리고 요즘은 고택체험도 함께 진행하기 때문에 구들장이 놓여져 있는 그곳에서 하룻밤 머물면서 집주인과 이집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정순왕후 생가는 원래 여러채의 건물이 있었으나 대부분 소실되고 안채와 별채만 남아있다고 합니다.

앞서 밝혔든이 정순왕후(1745∼1805)가 출생한 집이자 왕비가 되기 전까지 살았던 집이랍니다.

당초 이 집은 조선 효종 때 승지와 예조참의 등을 지낸 학주 김홍욱이 노부를 극진히 모시고 산다는 소식을 들은 효종이 그의 아버지인 김적에게 하사한 집인데 이후 김홍욱의 4대손이자 정순왕후의 아버지인 김한구에게 이어졌기에 이 집의 건립시기를 효종 시절(1649∼1659)인 약 360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정순왕후가 영조의 간택을 받은 과정도 극적입니다.

당시 아버지를 따라 한양으로 올라온 정순왕후는 15세의 어린 나이로 66세의 할아버지 영조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영조는 간택을 빈전에서 하지 않고 영조가 직접 면접을 통해 정했는데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처음 영조가 왕비 후보들을 둘러보니 처녀들 중 유독 혼자만 방석에 앉지 않고 방석을 앞에 두고 맨 방바닥에 앉아있는 여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이가 훗날의 정순왕후인 김한구의 딸이었는데 그는 영조가 이유를 묻자 그는 “방석에는 저의 아비의 함자가 쓰여 있어 차마 아비의 이름을 깔고 앉지를 못했사옵니다”라고 했다는군요.
그 당시에는 각 규수들이 준비해간 방석에는 아비의 이름을 수놓았다고 하네요.
 
두 번째로 영조는 “세상에 가장 깊은 것은 무엇이냐?”고 묻자 각 후보들마다 제각기 바다니, 호수니, 못이니, 계곡이니 많은 답을 늘어놓았으나 김한구 딸은 “마음이옵니다”라고 답을 했고 역시 영조가 이유를 묻자 “사람의 마음은 측량을 할 수 없기에 가장 깊습니다”라고 했답니다.
아주 총명했다 아니할수 없습니다.
결국 영조는 이 김한구의 딸을 계비로 맞아들인거라 합니다.
 
정순왕후 생가 건물은 ㅁ자형 평면을 갖춘 집으로,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 건물 좌우에 각각 3칸씩 덧달아 ㄷ자형 구조를 하고 있습니다. 남쪽에는 앞면 5칸·옆면 1칸의 별채를 배치하였는데 ㅁ자형 평면을 하고 있구요. 가옥의 후원과 안채를 둘러싼 담장은 자연석으로 쌓았으며 대문은 평문입니다.
 
ㄷ자형의 평면을 이룬 안채 중앙3칸은 넓은 대청을 두고 우측에 고방(庫房)과 안방 부엌이 이어져 있고 대청 좌측에 제실, 건너방, 광 등이 있으며 광 옆으로 사랑채와 안채로 통하는 중문칸이 나있습니다.

가옥의 후원과 안채 사랑채를 둘러싼 담장은 자연석 와담장이며 대문은 평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종도리와 함께 지붕의 하중을 받치도록 하였으며 지붕은 홑처마인데 1988년에 충남기념물 제68호로 지정됐습니다.
 
영화 ‘역린’ 보시고 정순왕후 생가를 들러 보시면 생가방문이 더 흥미로울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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