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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로 보낸 64년 "고향가니 꿈만 같아"

금마면 조기천 씨 남매,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

2014.02.26(수) 18:10:28 | 관리자 (이메일주소:hyedongkim@naver.com
               	hyedongk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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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여년 만에 꿈그리던 고향땅을 밟게 된 조기천 씨. 인터뷰 도중 전쟁 이후 헤어진 가족을 떠올리며 눈물을 보이고 있다.

“나의 고향은 황해도 은천면 연남리입니다. 인근에 백천온천이라는 유명한 관광지가 있어서 서울에서도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던 그런 곳이었지요. 학교는 백천초등학교, 백천중?고등학교를 나왔고 떠나올 때 나이가 19살이었어요.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기 직전이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9남매가 남부러울 것 없이 다복했습니다.”

조기천(82?금마면) 씨가 기억하는 북녘에서의 삶은 어느 가정과 특별히 다를 바 없는 평온한 일상이었다. 1950년 12월. 백천온천이 지척에 있어 관광지로 이름이 있었던 황해도 은천면 연남리 일대에는 6?25 전쟁 발발 이후 본격적인 전운이 감돌며 주민들은 날로 불안에 떨어야 했다. 중국인민지원군과 미국연합군과의 대치가 날로 거세지자 전쟁을 피해 남쪽으로 향하는 주민들의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훗날 역사서에 1?4후퇴로 기록된 12월 14일을 이틀 앞둔 1950년 12월 12일. 조 씨는 바로 위의 형인 조기연 씨와 함께 남녘행을 택했다. 긴긴 겨울밤의 끝, 아직 동이 트지 않아 칠흑과도 같았던 아침 7시에 두 형제는 부모, 형제들의 배웅을 받으며 그들을 서울로 데려다 줄 기차를 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시국이 심상치 않으니 너희 둘이라도 먼저 내려가거라. 남은 식구들도 곧 내려가마.” 조 씨가 아버지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당시 맹장수술을 받아 거동이 불편한 형을 이불보로 들쳐 업고 집을 나선 조 씨는 무작정 그렇게 남쪽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황해도 백천역을 출발해 서울역으로 향하는 기차는 조 씨 형제와 같은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콩나물시루 같은 객실은 말할 것도 없었고 열차 지붕에도 아슬아슬 몸을 실은 사람들로 빽빽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날의 기억이 생생해요. 나도 참 그땐 빼빼 말라서 뼈 밖에 없었는데 그 많은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아픈 형을 업고 다니려니 여간 힘들지 않았겠어요. 그래도 그땐 등 뒤에 형이 있다는 게 큰 의지가 됐어요. 추운 밤이었으니 이불을 서로 덮어주어 가며 불안함을 달랬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서울 땅. 여전히 북쪽으로는 인민군의 위세가 대단했다. 서울이 언제 함락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두 형제는 정처 없이 남쪽으로 향했다. 서울에서 수원으로, 수원에서 다시 경남 사천으로. 아픈 형을 고쳐 없고 20여일 동안 걷고 또 걸었다. 몸은 지칠 대로 지쳤지만 지나는 곳마다 잠을 재워주고 먹을거리를 나누는 사람들 덕에 계속 걸을 수 있었다. 그 사이 한강철교는 폭파되고 마지막 희망이었던 서울은 폐허로 변했다.

“같이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도 함께 걸었습니다. 철로는 끊어진지 오래고 무조건 남쪽으로 가야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그러다 사천까지 가게 됐는데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거기서 육군대령을 하고 있는 고향사람을 만나 교육대(임시군대)에 입소해 1년을 지냈어요. 그러던 중 생일날 보초를 서게 됐는데 북에 두고 온 부모님 생각이 어찌나 사무치던지요. 그때 참 많이도 울었습니다.”

사천 교육대 제대 이후 부산에서 부두일을 한동안 했다는 조 씨는 약 1년후 형과 함께 다시 서울로 올라가 온갖 궂은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남대문 지하차도에서 눈물 젖은 빵을 사 먹으며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일도 부지기수였지만 조만간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1953년 7월 27일. 한반도를 둘로 나눈 3?8선 앞에 부모?형제와의 재회를 꿈꾸던 두 형제의 바람은 처참히 사그라졌다. 시간은 흘러 정전 이후 60년이 흘렀고 그 사이 조 씨의 형님은 암으로 세상을 달리했다. 20대 후반 결혼한 조 씨는 금쪽같은 삼형제를 낳아 길렀고 세 자녀 모두 장성해 일가를 이뤘다.

지난 1976년에는 평생 못 볼 거라 생각했던 셋째 누님(조숙희?84?금마면)을 만나 누님이 살고 있는 홍성에 터를 닦고 함께 살았다. 20대 중반시절에는 7년여 간 영화배우?탤런트로 활약하기도 했고 특유의 부지런함으로 남부럽지 않은 재산을 모으기도 했지만 남한에서의 60여년의 삶은 조 씨에게 있어 늘 고향을 그리워해야 했던 회한의 삶이었다.

이런 조 씨에게 얼마 전 기적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한동안 중단됐었던 남북이산가족상봉이 다시 추진되고 상봉 명단에 조 씨와 조 씨의 셋째누님인 조숙희 씨가 포함됐다는 것이다. 조 씨 남매는 20일 강원도 속초에서 금강산 행 버스에 몸을 싣는다.

이번 이산가족상봉에서 조 씨는 6.25 전쟁 당시 월북한 첫째 누님 슬하의 두 자매(조카)를 만난다. 숱한 세월, 꿈에서나 그려왔던 혈육을 만난다는 생각에 조 씨에게 요즘 매일은 꿈만 같기만 하다.

“60여년의 세월이 주마등같이 스쳐갑니다. 한시도 잊은 날이 없었어요. 조카들을 만나 사무치게 보고 싶은 부모님과 형제?자매들 소식을 물을 거예요. 부모님 산소는 어디에 썼는지, 막내 여동생은 살아있는지, 북쪽에서의 삶은 또 어떤지….”

그는 생필품, 의약품, 건강식품 등 각종 선물들을 다시 확인했다.

“나중에 통일이 되면 부모님 묘소에 제일 먼저 찾아가 절을 드려야 하는데, 그런 날이 살아생전에 왔으면 좋겠습니다.”


명절이나 생일 때마다 북에서 갖고 내려 온 아버지의 사진을 걸어놓고 그리움을 달랬다는 조 씨. 꿈에 그리던 가족을 만날 생각에 조 씨의 마음은 이미 금강산을 향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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