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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한 떨기 하얀 연꽃처럼 피었다 간 조선의 여인

서산의 여류시인 '오청취당'을 기리며

2013.11.03(일) 22:27:56 | 자유새 (이메일주소:noblesse0550@hanmail.net
               	noblesse0550@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문 닫고 속된 무리 사양하며/ 다만 누각 엿보는 달을 사랑하였지/ 규중 안에 짝이 되어 서로 의지하니/ 씻긴 마음 고요하고도 그윽하여라.' (달을 사랑함 愛月 - 청취당집 11)

29세의 젊은 나이에 져버린 아까운 꽃. 그녀의 이름은 오청취당(吳淸翠堂, 1704-1732). 그녀는 지독한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한 떨기 하얀 연꽃처럼 피었다 간 조선의 여인이었다.

달을 많이 노래했던 그녀는 1704년(肅宗30)년에 태어나 1732년(英祖8)까지 29해의 짧은 삶을 살다갔다. 청취당의 짧았던 삶은 유독 여러 가지 고난이 많았는데, 그녀의 불운했던 삶은 유일하게 남아 있는 182수의 작품에 절절하게 서술되어 있다.

청취당은 경기도 양성((현 평택 포승면)의 해주 오씨 오기태의 4남 5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하지만 세상은 그녀에게 모질기만 했다. 여섯 살에 어머니를 잃고 길러 주던 할머니마저 일찍 죽어 외롭게 컸다. 22세에 4살 많은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의 김한량(1700~1752)에게 둘째 부인으로 시집 와서 스물아홉 살에 세상을 떴다.

당시 양반가에서 두 번째 부인으로 시집을 오는 예가 드물었지만 가세가 불우했던 탓이었으리라. 현재 서산 팔봉면 금학리에는 김한량과 오청취당의 부부 묘소가 있다. 김한량은 생전 3명의 부인을 뒀기 때문에 그의 묘소 뒤편에는 오청취당 외에 2명의 부인이 함께 잠들어 있다.

그녀는 어린시절 궁벽한 집안 살림 때문에 손은 바느질로 바빴지만 틈틈이 어깨 너머 배운 글자들로 학문을 익혔다. 당시 문집을 남긴 대다수 사대부 여성문인들이 독선생을 통해 자연스럽게 한문을 익혔는데, 청취당은 독학으로 한문을 익힌 것이 특징이다.

서산으로 시집온 후에도 그녀의 불운은 그치지 않았다. 26,7세에 연달아 자식을 잃고, 투병 생활의 고통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그녀가 남긴 182수의 한시중 ‘병중에 회포를 펴 스스로를 위로하며’라는 시는 자서전이자 강보에 싸인 아들에게 남긴 유서와 같은 시다.

'하늘이 어찌 이토록 나에게만 무심 하리오?/ 총명한 아이 주어 길이 만년 의지하게 하시는 도다/ 그대는 보았는가, 잠룡이 적시에 비 만나는 것을/ 분명코 먼 훗날 연못 속 물건만은 아니리라' (병중에 회포를 펴 스스로를 위로하며 中 - 청취당집 181)

청취당집(淸翠堂集)은 5언 절구 21수, 5언 율시 19수, 7언 절구 85수, 7언 율시 55수, 장편 고시 2수 등 총 182수로 구성되어 있다. 청취당의 불우한 삶을 반영한 시편들이 여류 시인 특유의 섬세하고 유려한 필치로 잘 나타나 있다. 내용 중에는 어머니와 할머니를 일찍이 여읜 슬픔을 절절히 토로하는가 하면, 투병 생활의 고통과 고단한 여성의 일상과 이상 세계에 대한 소망 등 그녀의 짧은 삶 속에서 포착했던 느낌을 빼어난 재능으로 형상화하였다.

‘청취당집(淸翠堂集)’은 오청취당이 생존해 있을 때 창작했던 한시 작품들을 그녀의 외손자(청취당 사후 남편 김한량의 세 번째 부인 파평 윤씨의 외손)인 박종규가 수집·정리하여 1803년(순조 3) 12월 하순에 편찬하였다.

박종규는 일찍이 어머니로부터 외할머니 청취당의 덕성과 지혜를 전해 듣고, 분부에 따라 청취당의 작품들을 수집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던 중 청취당의 친인척인 이인중(李仁中)으로부터 유고 154수를 얻게 되고, 청취당의 아우 오도겸(吳道謙)으로부터 28수의 초고를 다시 얻어 182수의 ‘청취당집’을 간행하게 되었다. 박종규는 청취당의 피를 나눈 외손자는 아니었으나,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고 청취당의 문학적 역량에 감동하여 ‘청취당집’을 편찬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여인네 삶이 모두 그러하겠지만 청취당은 문득문득 스스로를 ‘나그네’라 인식하고 고향과 어머니를 그리며 삶을 살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녀는 밤이 되면 방 사이로 비쳐 오는 달빛을 바라보며 꿈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꿈 속에서라면 그리운 부모와 동생도, 가고 싶은 고향 땅도, 동경하는 신선의 세계도 자유롭게 넘나들었을 것이다.

청취당의 작품에서는 신선세계를 동경하는 작품도 몇몇 등장한다. 청취당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 자신의 생이 다한 후에 신선세계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담곤 했다. 이는 전형적인 유선문학의 특징으로 당시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이를 작품으로 승화시켰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그녀는 29해의 짧은 생을 가난과 병마, 고독으로 몸부림치며 살았지만 자신의 존재와 재주에 대한 자부심과 자존감이 대단한 여성이었던 것 같다. 그녀 스스로 수양 땅에서 죽어간 백이·숙제의 절의를 염두에 두고 '성자의 맑은 성품과 대나무의 푸른빛을 취한다'는 의미로 청취당이라 호를 지었다. 그녀는 '경설국(慶雪菊)'이라는 별호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하늘이 자신을 이 세상에 무심하게 내려주지는 않았을 거라며 스스로를 가지와 잎이 무성한 '동국의 계수나무'라 칭한 것이라 한다.

연적(硯滴)
誰刻崑精作妙硯 누가 곤륜산 정기 깎아 묘한 연적 만들었나
文房四友五成眞 문방사우 연적 더해 오우가 바른 것이지
搖揚口吐銀鈴散 흔들어대면 입으로 은방울 흩어 토해내고
傾瀉耳垂玉索伸 기울이면 귀에서 옥줄 드리워 쏟아내네
魚見若壺望救活 물고기가 보면 병 같아 살려주길 바랄 터요
龍看似窟恨無雲 용이 볼 땐 굴속 같으니 구름 없음 한할 일
陶泓毛潁封功日 도홍과 모영에게 공을 봉하던 날에
何不贈號此器論 어찌 연적에겐 호 내리는 의론 없었을까 -吳淸翠堂

그녀는 결혼 생활 7년간 지은 182수의 한시를 남기고 스물아홉에 진 꽃이었다.

한떨기하얀연꽃처럼피었다간조선의여인 1

2013년 11월 3일 정순왕후 생가 마을이 있는 서산 음암면 유계리 마을 입구에 서산지역 문인들의 모임인 한국문인협회서산지부(회장 편세환) 회원들이 모여 오청취당을 기리는 시비가 세워졌다. 7년의 짧은 시간동안 그녀가 쏟아 낸 한 떨기 하얀 연꽃 향기가 300년 넘게 전해 내려오며 다시 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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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유교를 중시했던 사회상으로서 한 며느리의 문집이 어떻게 3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집안의 가보로 전해 올 수 있었을까? 청취당의 시숙부 김진경(1678-1767)은 그녀의 시를 외워 전하면서 "당나라 한시의 격조에 비교해 부족함이 없다"고 칭찬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한 명문가의 문학을 존중하는 아름다운 전통이 있기에 가능한 일. 현재 유계리에는 청취당이 살았던 생가는 남아있지 않지만 정순왕후 생가(기념물 68호)와 김기현 가옥(중요민속자료 199호)이 있어 그녀의 작품세계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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