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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성삼문 선생 묘역에 전해지는 전설을 따라서

하마비와 구두굽

2013.10.18(금) 15:39:13 | 조연용 (이메일주소:whdydtnr71@naver.com
               	whdydtnr71@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다시 찾아온 실업의 나날이다. 딸깍 딸깍 경쾌한 소리를 내며 사무실을 향해 걸어가야 했을 구두가 현관문 앞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어디선가 묻어온 흙을 그대로 묻힌채 놓여있는 한 켤레의 구두가 너 왜 거기 앉아 있냐고 물어온다.

가만히 구두를 바라보고 있자니 얼마전 논산시 가야곡면에 있는 성삼문 선생 묘역에 갔던 일이 떠 올랐다.  한 쪽 굽이 빠져나간채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구두가 수선을 기다리는 눈초리로 나를 빠꼼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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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가 대학입시에서 부활한다는 소식처럼 우연히 성삼문 선생의 묘역을 찾게 된 일은 나에겐 행운이었다.

무료한 실업의 일상에서 골방에 갖혀 곰팡이 피는 마음을 달래볼까 싶어 무작정 논산쪽으로 나갔다. 그러다가 길가에서 우연히 성삼문 선생 묘역을 안내하는 안내판을 발견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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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분명 행운이었다.

여기서 잠깐, 성삼문 선생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면 성삼문이란 이름은 선생을 낳을때 하늘에서 "낳았으냐?" 라는 세번의 물음이 들여온 후에 선생을 낳았다고 하여 三門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출생부터 비범했던 성삼문 선생은 그 일생 또한 비범하게 살다간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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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문 선생은 세종 1438년(세종 20년)식년문과에 급제하고 1447년(세종 29년)에 문과 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한다.

그리고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들때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와 함께 훈민정음 창제를 도운 인물이다.


또 요동에 유배되어 있던 명나라의 음운학자 황찬에게 열세번이나 다녀오면서 한글 반포에 공로가 큰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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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문 선생의 사당 왼쪽으로 신도가 있다.

100m정도 잔디로 나 있는 신도를 올라가면 성삼문 선생의 묘소가 나온다. 묘소 앞에는 선생의 삶에 대한 안내글이 적힌 팻말이 서 있다.

1458년(단종 1년)수양대군은 계유정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는다.그러나 세조를 왕으로 인정할 수 없었던 성삼문 선생은 아버지인 성승, 박팽년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한강에서 우마가 끄는 수레에 사지가 찢겨지는 거열형에 처해진다.

그래서 사육신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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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6년(세조 2년) 성삼문 선생이 거열형을 당한 뒤
죄인을 끌고 다니며 망신시키는 조리 돌림형에 처해진다.

그 과정에서 선생의 시신을 운반하던 지게꾼이 무더운 날씨에 지치고 짜증이 나서  독설을 내뱉자 하늘에서 '아무데나 묻어라'라는 소리자 놀라서 현 묘소에 시신을 묻고 달아났다고 한다.
 
그후 쌍계사에서 자고 있던 김한이라는 사람의 꿈에 한 장부가 나타나 "내가 있는 곳이 어찌나 더러운지 모르겠다"고 하여 잠에서 깨어난 김한이 승려와 함께 성삼문 선생의 묘소로 가 보았더니 백골이 들어나 있었다고.

그래서 입고 있던 적삼으로 백골을 싸서 묻어준 후 다시 봉분을 만들어 주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라 하여 일지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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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의 묘비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단정해서 안타까운 마음이다. 하지만 선생의 묘소에서 유일하게 오래된 시간의 흔적이 느껴지는 것은 비석 하나뿐이었다.

잠시 선생이 형장으로 끌려갈 때 읊었다는 시 한편을 찾아본다.

목숨을 재촉하는 북소리가 들리는데
돌아보니 해도지고 없구나
황천길엔 주막도 없을 것이니
오늘은 뉘 집에서 쉬어갈거나


짧은 시 속에 담겨있는 선생의 곧은 절개와 넉넉한 기품이 느껴지는것 같다.

죽음을 재촉하는 북소리를 들으면서 누구 하나 자신을 위해서 술 한 잔 부어줄 수 없고 또 누구 하나 자신을 위해서 제를 올려줄 수 없는 상황을 이렇게 짧은 시속에 담아낸듯 하여 더욱더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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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달리 타고 났으니 선생을 위해 제를 지내줄 수도 술 한잔 부어 드릴 수는 없지만 예를 갖춰 절을 올리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선생에 대한 예의였다. 그래서 같이 간 선배와 함께 선생의 묘역에 공손히 절을 올렸다.

한 나라의 충신이었던 선생의 흔적을 되짚어 내려오는 길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뿌듯했다. 잘 풀리지 않고 엉키기만 하는 내 삶에도 뭔가 새로운 빛이 새어들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게 왠일이란 말인가?

선생의 묘역을 뒤로 하고 내려오는 신도에서 구두굽이 뽑히는 사고가 발생했다. 순간 구두굽이 부러진줄 알았을 정도로 충격이 컸다. 아뿔사!~  그때 내가 간과한 사실 하나가 내 뒤통수를 때렸다.

下馬碑를 못 보고 지난 것이다.

선생의 묘역 입구에 하마비가  있는데 그 뜻은 '이곳은 신성한 곳이니 말에서 내려서 걸어가라'는 뜻이라고 한다.  신성한 선생의 묘역을 향해 걸어가면서 굽이 있는 구두를 신고 갔으니 얼마나 불경스러우셨을까?
 
거기다가 논산 가야곡에 있는 성삼문 선생의 묘역에 묻힌 신체의 일부가 선생의 다리라고 하니 이 또한 무심코 지나칠 일이 아니다. 하마비와 묘역에 묻힌 선생의 다리와 그리고 나의 구두굽......

시를 쓰는 사람이다 보니 왠지 詩 한편이 뚝딱 써 질것만 같았다. 그리고 다시 생각했다. 운동화를 갖춰신고 선생의 묘역에 다시 한번 참배하러 가리라고...그리고 詩 한편을 완성해보리라고

 

성삼문 선생 묘소 위치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 산 58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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