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통합검색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화면컨트롤메뉴
인쇄하기

사는이야기

당진 솔뫼성지, "천주교 신앙의 못자리"

2013.08.26(월) 11:37:39 | 오수금 (이메일주소:sjhdk334@hanmail.net
               	sjhdk334@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당진에는 당진을 대표하는 9경이 있습니다. 그중 제5경이 솔뫼 성지 입니다 .
솔뫼 성지라는 이름부터 뭔가를 짐작케 합니다. 소나무를 뜻하는 옛말 ‘솔’에다가 산의 순 우리말 ‘뫼’가 예사스럽지 않은 느낌을 풍깁니다.

맞습니다. 이곳은 말 그대로 성지입니다. 오래전 천주교 박해 때 많은 순교자들이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곳이면서, 특히 한국인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탄생한 곳입니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씨가 천주교 신앙으로 인해 박해를 받아 해미에서 옥사한 이후 4대에 걸친 순교자들이 나온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솔뫼성지 김대건 신부 기념관내 흉상

▲ 솔뫼성지 김대건 신부 기념관내 흉상
 

신앙의 의로움을 뜻하는 상징 조형물

▲ 신앙의 의로움을 뜻하는 상징 조형물
 

김대건 신부가 체포를 피해 선교활동을 하기 위해 상복으로 변장하고 다니던 모습

▲ 김대건 신부가 체포를 피해 선교활동을 하기 위해 상복으로 변장하고 다니던 모습


충청도 내포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솔뫼는 ‘소나무로 이루어진 산’, 곧 송산(松山)입니다. 이미 조선시대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내포를 ‘충청도에서 제일 좋은 땅’이라 칭하였습니다.

‘내포’는 바닷물이 육지 깊숙이까지 들어와 포구를 이루어 배들이 드나들며 새로운 문물을 전해주는 장소라는 뜻에서 생겨난 말이지요.

내포를 비롯하여 서해안 여러 지역에는 조선에 신식 문물이 본격적으로 전해지기 시작한 구한말 훨씬 이전부터 중국으로부터 건네지는 서학과 천주교 문화가 들어왔습니다.

김대건 신부가 유학길에 오를때 탔던 라파엘호

▲ 김대건 신부가 유학길에 오를때 탔던 라파엘호
 

천주교 박해 당시 모흡

▲ 천주교 박해 당시 모습
 

천주교 박해때 사용된 고문 도구들

▲ 천주교 박해때 사용된 고문 도구들
 

천주교 신자들의 머리에 씌웠던 고문 도구

▲ 천주교 신자들의 머리에 씌웠던 고문 도구


1784년경 김대건 신부의 백조부 김종현과 조부 김택현이 교리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하자 가장인 증조부 김진후(비오)도 입교하여 가문이 천주교 신앙으로 귀의했습니다.

이후 솔뫼를 내포 신앙의 못자리로 만들었죠. 김대건 신부의 가문은 천주교 신앙에 귀의한 후 잦은 박해로 가족들이 여러 차례 투옥되고 고문을 받는 수난을 당했습니다.

당시 붙잡힌 신자들의 모습

▲ 당시 병오박해 때 붙잡힌 신자들의 모습


솔뫼에서 대대로 명망이 높았던 김씨 가문이었지만 선대의 긴 옥중 생활로 가세가 기울어 신앙을 지키고 살기가 어려워져만 갔습니다.

이미 증조부와 종조부가 순교한 천주학 집안이어서 가세는 기울대로 기울었고 또 어느 대 새로운 박해가 닥칠지 몰라 조부 김택현은 김대건 신부가 7세때 경기도 용인 산골로 이사했습니다.

어린 김대건은 그곳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중 대표 신학생으로 뽑혀 마카오로 유학하여 신학을 계속 공부했고 상해에서 신품을 받아 입국한 뒤 선교활동을 하던 중 1846년에 체포되어 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습니다.

김대건 신부 생가지

▲ 김대건 신부 생가지
 

당시에는 아흔아홉칸의 명문가였다고 합니다

▲ 당시에는 아흔아홉칸의 명문가였다고 합니다
 

김대건 신부

▲ 김대건 신부


1906년부터 예산 합덕 본당 쪽에서 솔뫼를 성역화하기 위하여 인근의 토지매입을 시작하였고, 1945년에는 솔뫼에 김대건 신부 복자비(福者碑)를 설립하였으며 1973년부터 솔뫼 성역화 사업을 계획적으로 시작하였습니다.

1996년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기념 사업으로 김 신부 생가 복원과 박물관 겸 경당을 건축하기로 하였고 충청남도는 김대건 신부 생가터를 충남 지방문화재 기념물로 지정하였습니다.

성지의 조형물. 고난의 역사를 상징하는 듯.

▲ 성지의 조형물. 고난의 역사를 상징하는 듯.
 

박해를 당하는 순교자들

▲ 박해를 당하는 예수 상
 

박

▲ 박해를 당하는 신자들의 입체 상

김대건 신부 동상

▲ 김대건 신부 동상
 

솔뫼성지 안마당의 순교 조형물

▲ 솔뫼성지 안마당의 순교자 조형물
 

성지 정원에 새워진 거대한 예수 상

▲ 성지 정원에 새워진 십자가에 못박힌 거대한 예수 상


2004년에는 김대건 신부 생가를 복원하고, 이듬해 신부 기념관을 건립하기에 이르러 오늘날 솔뫼성지가 ‘순교자 신앙과 문화의 전당’으로 자리잡게 된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가 살던 때는 아흔아홉 간이나 되는 큰 집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우물과 집터만 남아 있고 대나무들이 주위에 있습니다.

헌재 솔뫼 성지는 전국의 신자들이 찾아와 신앙의 고향을 직접 보고 모든 순례자들의 가슴에 깊은 신심과 감명을 받아 가는 곳입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님의 탄생지이며 내포신앙의 중심지인 솔뫼 성지. "신앙의 못자리"라고도 불리우는 이곳을 순례하는 사람들에게 박해시대 신앙공동체의 숨결과 이시대 진정한 삶의 가치를 찾는 곳, 솔뫼성지입니다.

 

오수금님의 다른 기사 보기

[오수금님의 SNS]
댓글 작성 폼

댓글작성

충남넷 카카오톡 네이버

* 충청남도 홈페이지 또는 SNS사이트에 로그인 후 작성이 가능합니다.

불건전 댓글에 대해서 사전통보없이 관리자에 의해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