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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놀라운 역사, 흥선대원군 아버지 남연군 이구의 묘와 풍수지리

2013.07.30(화) 12:00:11 | 오수금 (이메일주소:sjhdk334@hanmail.net
               	sjhdk334@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내가 사는 고장, 나의 고향 충남에 구한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버지인 남연군 이구가 예산으로 내려와 터를 잡고 있습니다.

 이하응의 아버지 이구는 물론 고인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필요에 따라 부모의 묘소를 옮기기도 하는데 그런 일을 일컬어 이장(移葬)한다고 합니다.  당시 경기도 연천에 있던 이구의 묘가 왜 이곳 예산까지 내려 왔을까요?
 

흥선대원군 남연군 이구의 묘가 있는 예산군 가야산의 산자락

▲ 흥선대원군 남연군 이구의 묘가 있는 예산군 가야산의 산자락


 역사는 그래서 뒤짚어 보면 항상 반전과 아이러니, 그리고 심지어 흥미진진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참 재미있습니다.

 이 재미있는 역사적 사실을 직접 눈으로 보기 위해 예산의 남연군 이구 묘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학창시절, 국사 시간에 흥선대원군 이하응에 대한 일을 많이도 배웠기에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고 관심을 가질듯 해서입니다.

 책으로만 보던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예산까지 달려가기 어려운 도민들과 독자님들을 위해 현장을 답사하게 됐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했듯이요.

 

묘가 있는 가야산 구릉 아래에서 올려다 본 묘지 터. 상석만 보입니다.

▲ 묘가 있는 가야산 구릉 아래에서 올려다 본 묘지 터. 상석만 보입니다.
 

묘지 우측에서 전경

▲ 묘지 오른쪽 앞에서 본 전경
 

묘지 왼쪽 앞에서 본 전경

▲ 묘지 왼쪽 앞에서 본 전경


 이구의 묘는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의 가야산 산자락 아래에 있었습니다. 일반 평지보다는 약간 높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위치를 평지로 보았을 때 약 30m정도의 구릉의 높이에 묘가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그의 묘가 경기도 연천에서 당시에 초고의 명당으로 꼽힌 이곳 예산까지 무슨 연유로 내려 왔을까요?

 그 막전막후를 들여다 보기로 하지요.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영조의 후손이며 고종의 아버지입니다.
 우리가 역사시간에 배웠듯 흥선은 주변에서 무척 많은 괄시를 받았는데, 그러던 어느 날  당시 조선 최고의 지관(地官)이었던 정만인으로부터 귀가 솔깃한 2가지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충남 예산의 가야산에 2대에 걸쳐 천자(황제)가 나올 자리인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가 그 하나고, 두번째는 역시 충남 보령의 광천 오서산에 만대에 걸쳐 부귀영화를 누릴자리인 만대영화지지(萬代榮華之地)가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충청도 땅은 사람들이 잘 살고 명예도 얻는 터가 많은듯 합니다. 당대 최고의 지관이 꼽은 두 지역 모두 다 충남이었으니까 말이죠.

묘지 정면에서 본 봉분

▲ 묘지 정면에서 본 봉분. 멀리 뒤에 산자락이 보입니다.
 

묘지 뒤 중앙에서 앞을 바라본 전경

▲ 묘지 뒤 중앙에서 앞을 바라본 전경. 비전문가인 제가 봐도 정망과 산세가 예사롭지 않네요.


 하여튼 이 말을 들은 대원군은 망설일 것도 없이 가야산의 이대천자지지를 지목합니다.

 당시 안동김씨 일파들로부터 갖은 수모를 겪어 왔던 흥선대원군은 왕권에 대한 야욕이 더없이 컸기 때문에 이런 결정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일이 간단치는 않았습니다. 지관 정만인이 꼽아 준 이구의 묘지 터에는 가야사라는 사찰이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야망이 있던 왕손에게 그 같은 절 따위는 문제 될게 없었습니다. 그는 사람을 시켜 이 가야사를 하루아침에 불 질러 버립니다.

  이어서 즉시 자신의 아버지인 이구의 시신을 그곳으로 옮기게 되는 것입니다.

묘지 봉분 앞에서 아래를 내려다 본 모습. 흥선대원군이 불지른 가야사의 유물을 찾기 위한 작업이 진행중입니다.

▲ 묘지 봉분 앞에서 아래를 내려다 본 모습. 흥선대원군이 불지른 가야사의 유물을 찾기 위한 작업이 진행중입니다.
 

묘지 왼쪽의 자연석 바위

▲ 묘지 왼쪽의 자연석 바위


   전문가들의 견해와 예산군엣 만들어 놓은 이 묘의 위치를 보면 이렇습니다.

 묘의 좌향은 해좌시향이고 득수는 락득진파(동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막힘)라고 합니다. 묘의 주산은 석문봉이며 옥양봉, 가야봉이 혈을 감싸고 있는데 좌청룡 우백호가 혈장을 감싸고 내려오다가 앞이 탁 트이게 그치고 양쪽으로 이어 내려가면서 혈장을 향해 수그리는 모양이 흡사 문무백관이 임금을 알현하는 형세라 하네요.

거기다가 보는 이로 따라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형세다 하여 오룡쟁주형 이라고도 부른ㄷ고 합니다. 듣기만 하여도 기기묘묘 합니다.

 그렇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흥선대원군이 이구의 묘를 옮긴 뒤 7년후에 차남 명복을 낳았는데 그가 대한민국 황제 고종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의 둘째 아들(대원군의 손자) 역시 구한말 대한민국 마지막 왕인 순종이 되었습니다.

풍수지리의 사실적 결과에 놀라움을 금할수도 없습니다.

봉분 앞 석등에 난 구멍을 통해 본 이구의 묘.

▲ 묘지 앞 석등에 난 구멍을 통해 본 이구의 묘 봉분. 문득 기구했던 구한말 역사가 오버랩 됩니다.
 

저 앞 산은 오늘 2013년에 본 이구의 묘에 대해 뭐라 평가하고 있을까요?

▲ 저 앞 산은 오늘 2013년에 본 이구의 묘에 대해 뭐라 평가하고 있을까요?


 어쨌거나 풍수지리에 입각한 지관의 혜안 덕분에, 그의 조언대로 아버지 이구의 묘를 옮긴 덕분에 모든 소망이 다 이뤄진 것인지는 모르지만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야망을 위해 멀쩡한 절을 불사르는 일까지 감행했던 것입니다.

 그 역사적 현장이 이곳 예산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입니다.

 경위와 과정이야 어떻든 그렇게 왕위에 오른 고종과 사실상 전권을 행사한 그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어 고종의 후계인 순종이 정치를 잘하여 우리나라가 일본의 손아귀에 넘어가지만 않았다면 그나마 오늘날 흥선에 대한 평가는 조금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돌이켜 보건데 대한민국 5천년 역사상 구한말 일제 강점기 36년은 어쩌면 가장 치욕적이고 가장 불행했던 시기였습니다. 그 때문에 결과적으로 나라가 두동강이 났고 6.25라는 비극적 전쟁까지 치렀습니다.

 남연군 이구의 묘를 보면서 우리 역사와 위정자들, 정치적 야망과 개인의 영달을 위한 욕구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도 생각하게 만듭니다.

 남연군 이구의 묘의 위치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산 5-28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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