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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상록수 문학의 산실'을 찾아서

심훈의 문학세계 엿보기

2011.10.18(화) | 조연용 (이메일주소:whdydtnr71@naver.com
               	whdydtnr71@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며칠전에 충남작가회의 주최로 심훈 선생님 문학기행을 다녀왔습니다. 서둘러 올려야지 했는데 게으름이 발동해서 살짝 김빠진 기사를 올리게 되어서 살짝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시간을 되돌려서 지금부터 저와 함께 필경사로 떠나 보시지요. 대전에 있는 평송청소년수련원에서 출발한 버스가 한참을 달려 당진 필경사 앞 마당에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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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지식 없이 ‘필경사’를 발음하다보면 무슨 절 이름이 아닌가 착각하게 되는데요. 필경사는 심훈 선생님이 자신의 작품 활동을 위해 직접 설계하여 지은 집이라고 합니다. ‘필경사’라는 옥호에 대해서 심훈 선생님은 자신의 시 제목에서 따온 것이라고《필경사 잡기》라는 글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심훈선생님은 1932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자신의 아버지가 살고 있는 당진으로 내려와서, 독립하여 살고자 이 집을 직접 설계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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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는 1997년 12월 23일 충청남도기념물 제10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현재는 당진군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습니다. 대지 661㎡에 건평 62㎡(18.7평)인 아담한 팔작지붕의 목조집입니다. 파란만장한 역사의 흔적을 증언하듯이 이 필경사도 한때는 교회로 사용되었는데 심훈 선생님의 장조카인 심재영씨가 다시 사들여 관리하다가 당진군에 희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필경사에서는 한국 농촌소설의 대표작 중 하나인 《상록수》(1935), 《영원의 미소》《직녀성》 등이 여기에서 집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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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전시관 내부에는 심훈선생님의 일대기와 예술 활동을 분야별로 정리하여 게시하고 있습니다. 연혁, 출생과 성장, 중국 유학과 귀국, 문예활동, 영화 활동, 문학 활동, 당진정착과 문학 활동, 상록수, 사망, 심훈 기념비, 상록문화제 순으로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되어 있어 학생들에는 정말 좋은 학습 자료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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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며는삼각산(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한강(漢江)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종로(鐘路)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드리받아 울리오리다.두개골이 깨어져 산산조각 나도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恨)이 남으리까. 그 날이 와서, 오호 그 날이 와서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기어커다란 북을 만들어 둘처메고는여러분의 행렬(行列)에 앞장을 서오리다.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그 자리에 꺼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심훈의 생애와 활동
1901. 9. 12 서울~1936. 9. 16 서울 출생 소설가·시인·영화인으로 활동하셨습니다. 하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상록수> 소설로 많이 알려져 있어서 단순히 소설가로 활동하셨던 것으로 착각하는 사례가 많습니다. 심훈 선생님의 문학세계는 일제강점기에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소설을 주로 집필하셨습니다. 본관은 청송. 본명은 대섭(大燮), 아명은 삼준·삼보. 호는 해풍(海風). 백랑(白浪)이라는 별호도 사용했습니다. 아버지 상정(相珽)과 어머니 해평윤씨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습니다. 큰형 우섭은 〈매일신보〉 기자를 거쳐 방송국장 등을 역임했으며, 작은형 명섭은 교회 목사였습니다. 1915년 서울교동보통학교를 나와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며, 1917년 왕족인 이해영과 결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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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운동 때 투옥되었다가 집행유예로 석방된 뒤 이 사건으로 퇴학당했으며, 1920년부터 3년간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합니다. 망명기간 중 베이징[北京]·상하이[上海]·난징[南京]에서 활동하다 항저우[杭州]의 즈장[之江]대학에 입학. 1923년 귀국,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을 내세운 염군사(焰群社)의 연극부에 가담해 신극 연구단체인 '극문회'(劇文會)를 조직합니다.

1924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해 소설 〈미인의 한〉 후반부를 번안했고, 부인 이해영과 이혼합니다. 1925년 영화 〈장한몽〉에서 이수일 역을 대역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었으며, 그해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 발기인으로 참여했다가 이듬해 이탈한 것으로 보입니다. 1926년 〈동아일보〉에 한국 최초의 영화소설인 〈탈춤〉을 연재했으며, 박헌영·임원근·허정숙 등과 함께 '철필구락부사건'(鐵筆俱樂部事件)으로 동아일보사에서 해직당합니다.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정식으로 영화를 공부했으며, 6개월 후에 돌아와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각색·감독해 단성사에서 개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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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해 〈우리 민중은 어떠한 영화를 요구하는가〉 등의 평론으로 프로 작가들과 논쟁을 벌였다. 1930년 신여성 안정옥(安貞玉)과 재혼합니다. 1931년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생활을 하다가 이듬해 충청남도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로 내려가 창작생활에 힘을 쏟았습니다. 1933년 8월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으로 잠시 근무했고, 1935년 장편 〈상록수〉가 〈동아일보〉 발간 15주년 기념 현상모집에 당선되자 이때 받은 상금으로 상록학원을 설립했으며, 1936년 〈상록수〉를 직접 각색·감독해 영화로 만들려고 했으나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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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심훈선생님을 모신 묘지입니다. 심훈 선생님의 삼남 심재호 선생님께서 이곳으로 이장하셨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이곳이 아닌 서울 근교에 선생님의 묘소가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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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 선생님의 삼남 심재호 선생님입니다. 심재호선생님께서는 오랫동안 미국에서 사셨다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주로 신문기자생활을 하셨고 또 책도 많이 집필하셨다고 합니다. 현재도 미국에서 거주하고 계시지만 심훈선생님의 친필원고와 유품들을 수집해서 당진 땅 어딘가에 보관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심재호 선생님의 소원은 심훈 문학관이 이 필경사에 건립되어서 심훈 선생님의 친필원고와 유품들이 함께 보관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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