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m×16.6m 확인…목탑과 같거나 이른시기 조성
지난해 황금사리병(사리기)이 발견돼 화제가 됐던 부여 왕흥사지(사적 제427호)의 금당지가 백제금동대향로 출토로 유명한 능산리사지의 금당지보다 규모가 큰 것으로 확인됐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심영섭)는 부여 왕흥사지에 대한 9차 발굴조사에서 금당지의 규모가 동서 너비 22.7m, 남북길이 16.6m로 확인됐다고 11일 밝혔다.
▲ 왕흥사지 금당지 전경.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
왕흥사지 금당지는 또 사질층 기단토에 점질토와 마사토를 반복 다짐으로 성토했는데, 최대 70㎝ 가량 잔존해 있다.
이번 조사에서는 또 백제 왕흥사의 금당이 목탑과 같거나 이른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나타났으며, 금당과 목탑의 간격이 다른 절터에 비해 가까운 점과 고려시대에도 두 건물을 재사용한 점도 확인됐다.
부여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9차 조사를 통해 금당의 규모가 명확히 밝혀졌으며, 금당과 목탑이 동시 또는 목탑이 뒤늦게 조성된 것이 확인됐다”며 “이는 지난해 발견된 사리기 명문의 연대가 사찰 조성 연대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음을 말해준다”고 설명했다.
연구소는 앞으로 강당지와 회랑지에 대한 연차적인 조사를 실시, 왕흥사지의 전모를 확인한다는 방침이다.
▶왕흥사지는
부여 왕흥사지는 백제시대 주요 사찰로, 백제 왕이 항상 배를 타고 절에 가 향불을 올렸다거나 꽃과 나무가 사철 내내 아름다워 왕이 자주 찾았다는
▲ 지난해 왕흥사지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 왼쪽부터 황금사리병, 은제사리병, 왕흥사 창건과 관련된 중요한 사료를 제공하는 글이 새겨진 청동사리함. |
특히 지난해 10월에는 목탑지 심초석 사리공에서 황금사리병을 봉안하고 있는 은제 사리병 및 명문 청동사리함과 다양한 백제 공예품이 무더기로 발견돼 이목이 집중됐다.
원통형인 청동사리함에는 ‘정유년(577) 2월 15일 백제 창왕이 죽은 아들(왕자)을 위해 사찰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 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됐다’는 절 창건과 관련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새롭게 확인해 주는 글이 새겨져 있다.
황금사리병은 목탑지 심초석 끝부분 가로 12㎝, 세로 16㎝, 높이 16㎝의 사리공 내부의 청동 사리함 및 은제 사리병에 차례로 봉안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