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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도립공원

충청의 역사와 기상을 품은 곳

옛 이야기

윤봉길 의사

제 강점기에 활약한 독립운동가이다. 1932년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왕의 생일과 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행사장에 폭탄을 던져 일제에게 피해를 입혔다. 이 의거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의 의거와 함께 ‘한국 독립운동의 2대 쾌거’로 평가받고 있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 두 아들 모순(模淳)과 담(淡)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예산 윤봉길의사 유적(禮山 尹奉吉義士 遺蹟): 사적 제229호

  • 독립운동가 매헌 윤봉길 의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사적지
  • 1967년 사당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1968년에 충의사(忠義祠)가 건립됨. 1972년에 충의사와 생가, 성장한 집, 부흥원 등을 일괄 사적지로 지정함. 이후 유물전시관, 동상, 충의관 등을 건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음
  • 저한당(抯韓堂)은 윤봉길 의사가 4살 때부터 상해로 떠나기 전까지 살던 집으로 원래 6칸의 작은 집이었으나 1932년에 재미 동포가 채무 변제금 명목으로 보내온 돈으로 현재 상태로 개축하였다고 함

윤봉길 의사 유적-충의사

윤봉길 의사 유적-충의사

충의사 윤봉길 의사 영정

충의사 윤봉길 의사 영정

윤봉길의사 유적-어록탑

윤봉길의사 유적-어록탑

윤봉길의사 유적-기념관

윤봉길의사 유적-기념관

윤봉길의사 유적-저한당

윤봉길의사 유적-저한당

저한당 현판

저한당 현판
흥선대원군

조선 후기의 왕족·정치가. 고종의 즉위로 대원군에 봉해지고 섭정이 되었다. 당파를 초월한 인재등용, 서원철폐, 법률제도 확립 으로 중앙집권적 정치기강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경복궁 중건으로 백성의 생활고가 가중되고 쇄국정치를 고집함으로써 국제관계가 악화되고 외래문명의 흡수가 늦어지게 되었다. 임오군란(壬午軍亂), 갑오개혁 등으로 은퇴와 재집권을 반복하였다.

남연군묘 전경

남연군묘 전경
남연군묘: 충남기념물 제80호
  •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이구(李球)의무덤으로 원래 연천에 있었으나 현위치가 명당이라는 지관의 말을 들은 흥선대원군이 1846년에 이곳의 가야사를 폐사하고 남연군의 묘를 이장함
  • 남동향사면의 구릉 상단부에 커다란 봉분을 조영하고, 그 앞에는 방형의 상석과 이수를 갖춘 비를 세움. 석양 2마리, 석주 2구를 좌우로 세우고 묘 정면에 석등을 위치함

남연군묘 도굴사건

  • 1868년 독일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의 묘소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으로 오페르트의 『조선기행』에 따르면 조선 천주교인 3명이 병인박해의 생존자인 페롱신부에게 제안한 계획이라고 한다.
  • 1866년에 두 번 통상을 요구했다가 실패한 오페르트는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자 미국인 젠킨스와 함께 항해 계획을 세웠고, 이후 페롱 신부와 조선 천주교인 몇 명을 길잡이로 삼아 조선으로 향했다.
  • 4월 18일 가선 차이나 호를 타고 행담도에 도착, 소형 증기선 그레타로 갈아타고 삽교천을 올라가 구만포에 도착하여 덕산 관아를 습격하였고 오후 5시경 남연군묘에 도착해 무덤을 파헤쳤으나 광중의 석회를 깨지 못했고, 썰물 시간이 다 되자 결국 철수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다시 약탈을 자행했다.
  • 오페르트 일당은 조선 정부와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격노한 대원군은 대화를 거부하였고 오페르트 일당은 동감도에서 약탈을 하다가 조선군의 공격으로 병사 두명을 잃고 조선에서 떠났으며 이 사건으로 조선에서는 척화분위기가 더욱 고조되었다.
가야 9곡의 유래

영조때 판서를 지낸 병계 윤봉구(1681~1767)선생이 가야계곡의 아름다운 비경 아홉 곳을 ‘가야 9곡’이라 칭하고 그의 문집에 기록해 놓음

가야 9곡

가야 9곡

제1곡: 관어대

제1곡: 관어대
  • 옥계의 물이 한 곳에 모이는 곳으로 넓은 개울이 형성되어 작은 배가 있었고 낚시하기에 아주 좋은 곳

제2곡: 옥병계

제2곡: 옥병계
  • 가얏골에서 내려오는 물이 크게 휘돌아 소를 이룰 곳으로 큰 절벽이 있었으며, 그 위에 강당이 있었다고 함, 덕산현의 관기가 바위 위 강당에서 놀다가 실수로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이 있어 기암으로도 불림

제3곡: 습운천

제3곡: 습운천
  • 가얏골 물에 쓸려온 토사가 쌓이고 중선동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이 합해지는 곳으로 습지처럼 형성되어 늘 신비로운 구름이 덮여 있었다고 함

제4곡: 석문담

제4곡: 석문담
  • 수량이 풍부한 작은 폭포가 있는데 양쪽에 대문 기둥처럼 바위가 솟아 있어 석문담이라 부르며 우암 송시열은 ‘취석’을 죽천 김진규는 ‘석문담’이라는 글씨를 바위에 남겼다고 함

제5곡: 영화담

제5곡: 영화담
  • 복숭아나무가 많아 꽃이 피면 물속에 비춰지고 꽃잎이 떨어져 경치가 아주 좋았다고 함

제6곡: 탁석천

제6곡: 탁석천
  • 조선시대에는 스님들도 국가 노역을 담당하였는데 가야사 스님들은 종이를 만들었다고 함, 닥나무를 물에 불리고 껍질을 벗겨 찧었다고 하며 넓은 소를 이루고 있어 멱감는 곳으로 유명함

제7곡: 와룡담

제7곡: 와룡담
  • 덕산현감이 기우제를 지내기도 한 곳으로 죽천 김진규는 이곳 바위에 ‘와룡담’이라 새겼고 그 옆에는 깊은 자연동굴이 있어 용이 산다는 전설이 있음

제8곡: 고운벽

제8곡: 고운벽
  • 수렴동 계곡에 큰 바위가 서있는데 서령태수로 왔던 치치원 선생이 쉬어갔다는 전설이 있어 그 호를 따 고운벽이라 함

제9곡: 옥량폭

제9곡: 옥량폭
  • 석문봉과 옥양봉 사이의 계곡에 두 개의 크고 긴 바위가 있어 이곳으로 계곡물이 흘러 폭포를 이루는데 이 근처엔 백목련이 자생하여 봄철 신비로운 장관을 연출했다고 함
원효

신라의 승려로 일심(一心)과 화쟁(和諍) 사상을 중심으로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으며 수많은 저술을 남겨 불교 사상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원효암 터 전경

원효암 터 전경
원효암 터(원효와 해골물 관련)

원효암 터는 원효대사가 잠시 머물렀던 곳이라 전해진다.
원효대사가 661년 의상대사와 함께 당나라로 공부하러 길을 떠날 때 밤이 늦어 이곳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다.
이때 어둠속에 목이 말라 손으로 더듬다가 묵직한 바가지 같은 게 잡혀 그 물을 다 마시고 갈증을 풀었다고 한다.
그러나 날이 밝자 잠결에 마신 물이 사람 해골 속에 든 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것을 통하여 대사는 크게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원효암 터를 병풍처럼 둘러싼 원효암(元曉巖) 아래에는 갈수기에 마르지 않는다는 은술샘(銀潏泉)이 있다.

  • 담당부서 : 도립공원과
  • 문의전화 : 041-635-7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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