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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이 낙성식에 발원문을 지어 올린 논산 개태사

2020.09.03(목) 23:04:52해송이송희(shreer@naver.com)

개태사(開泰寺)는 936년(태조 19)에 고려의 왕건이 후백제를 제압하고 세운 사찰이다. 개태사에 전하는 문화재로는 석조삼존불입상과 오층석탑, 철확 등이 있고 개태사지에서는 석조공양보살상과 석조(石槽) 등이 수습되었다. 개태사 마당에 세워져 있는 오층석탑은 개태사지에서 옮겨온 것인데, 원래는 석조공양보살상과 한 짝을 이루고 있었다.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이 세워져 있는 현재의 개태사 구역은 936년 태조의 명으로 창건되기 시작하여 940년 완공되었다. 태조 왕건이 개태사의 낙성을 기념해 직접 작성한 '개태사화엄법회소'에 따르면, 일리천 전투에서 패배한 후백제의 신검이 마성(馬城)에 주둔하고 있었던 왕건에게 와서 항복을 청하였다고 한다. 신검이 항복을 청한 장소는 당시 고려군 지휘부가 주둔했던 왕건의 숙영지라 할 수 있는데, 현재 개태사 주변에 있는 토성이 바로 마성으로 비정되고 있다. 특히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이 세워진 자리가 마성의 중심부에 해당하는데, 이 위치가 바로 신검이 왕건에게 항복한 장소로 추정된다. 즉 이곳 개태사는 고려의 태조 왕건이 후백제로부터 최후의 항복을 받은 역사적 장소이며, 마침내 후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룬 상징적인 장소인 셈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개태사(開泰寺) 주차장 앞에 서워져 있는 안내문에 '4년 여의 대역사(大役事) 끝에 완공된 개태사 낙성식에 태조 왕건은 친히 발원문(發願文)을 지어 부처님께 올리고 통일 고려국의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한다'고 적고 발원문(親製原文) 내용도 적어놓았습니다.
 

 
주차장에서 나와 개태사 입구로 향하는 길로 올라섭니다. 개태사는 논산 8경 중 6경으로 꼽히는 곳입니다.
 


정면에 보이는 건물이 개태사의 입구에 해당하는 신종루(神鐘樓)이고 그 앞에 보이는 다리가 개운교(開運橋)입니다.
 

 
개운교 아래 천운지(天運池)라고 하는 작은 연못이 있는데, 천운지에는 황수련이 예쁘게 피어 있답니다.
 

 
신종루 아래를 통해 개태사로 들어가게 되는데 좌우측에는 사천왕이 동서남북 사방을 지키고 있군요.
 

 
신종루 아래를 지나 개태사 마당에 들어온 다음 뒤돌아 보면 신종루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신종루 안에는 큼지막한 종(鐘)과 북이 매달려 있어요.
 

 
개태사 마당 한가운데에는 충남도 문화재자료 제274호인 개태사 오층석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개태사 오층석탑은 개태사지(開泰寺址) 북쪽 건물터에 있던 탑인데 이곳으로 옮겨놓았다고 합니다. 1층 탑 몸 아랫부분과 5층의 지붕돌 윗부분이 사라져 아랫부분인 기단부와 윗부분인 보주 등을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남방물교의 전수자 연기조사께서 인도에서 모셔온 부처님 진신사리 16과가 이 5층석탑에 봉안되어 있다고 합니다.
 -개태사 현지 안내문에서
 

 
석조여래삼존입상이 봉안되어 있는 극락대보전(極樂大寶殿)입니다. 그 앞에는 지금 새로운 대웅전 중창불사가 진행 중입니다.
 

 
극락대보전 안에서는 백중기도가 한창입니다. 앞에 보이는 불상이 보물 제219호인 석조여래삼존입상(石造如來三尊立像)입니다.
 

 
극락대보전 왼편에는 태조 왕건의 어진전(御眞殿)이 있습니다. 936년(태조 19년) 황산(黃山, 현 논산시 연산면)에서 후백제 신검(神劍)으로부터 항복을 받은 왕건은 통일의 대업이 부처님의 은혜와 하늘의 도움이라 여겨 황산을 천호산(天護山)으로 개명하고 태개사를 창건하였다고 합니다. 개태사에는 왕건의 어진이 봉안되어 있어서 진전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기일마다 제를 올렸다고 합니다. 왕건의 옷 한 벌과 옥대가 보관되어 있었으며  국가 대사가 있을 때마다 어진에 나아가 길흉을 점치기도 했다고 합니다.
 -개태사 현지 안내문에서
 

 
어진전 내부의 모습입니다. 태조 왕건의 영정을 모시고 있으며, 고려 말기가 되기 전까지는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곳이라고 하네요.
 

 
종무소 옆 축대 위에는 허름해 보이는 누각이 하나 서 있는데 일반 사찰의 삼성각에 해당한다고 하는군요.
 


바로 옆에는 충청남도 민속문화재 제1호인 철확이 있습니다.
 
개태사 철확은 태조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개국사찰로서 개태사를 세웠을 때 부엌에서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무쇠솥이다. 고려 후기에 개태사가 폐허가 되는 바람에 벌판에 방치되어 있었는데 1887년(고종 24년)대홍수로 약 4km 정도 떠내려가면서 일제때 경성박람회에 출품되기도 했다. 그 후로 마을에 흉년이 들자 연산 사람들이 총독부에 진정서를 내는 등 무쇠솥을 찾기 위해 노력하여 마침내 찾아 연산공원에 전시하다 1981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왔다. 이 솥은 가뭄 때 다른 곳으로 옮기면  비가 내리는가 하면, 수해를 막기도 하고 풍년이 들게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솥은 직경 289cm, 높이 96cm, 둘레 910cm로 테두리 없는 벙거지 모자를 뒤집어 놓은 형태다. 두께는 약 3cm이고 밑바닥의 직경은 약 90cm로 둥근 굽이 있어 열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도록 만들어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장을 끓이던 솥이라는 기록이 있고, 1944년에는 고철로 쓰기 위해 부수려고 하자 갑자기 천둥벼락이 쳐서 그대로 두었다는이야기가 전한다.
 -개태사 현지 안내문에서
 

 
이 솥은 그 크기만큼이나 다양한 전설을 많이 갖고 있는데, 한 전설에 의하면 고려말기 왜적들의 침입으로 개태사는 쇠퇴하여 가고 가마솥은 녹슬어 쓸모 없게 뒹굴고 있었는데, 왜적들의 침입이 있자 우리나라 군사들의 식사를 마련하기 위하여 이 솥을 다시 쓰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솥에 밥을 지어 먹은 군사들이 잘 싸워 그때부터 왜적들이 물러가기 시작했다. 그 다음부터 이 솥은 왜적들에게 원한을 지게 되었으며, 왜적들이 이 솥을 옮겨가려고 할 때면 하늘에서 천둥과 벼락이 쳐 손을 대지 못했다고 전한다. 
 -논산시청 홈페이지에서
 

 
예쁘게 핀 배롱나무꽃과 철확을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철확 앞에서 내려다 본 극락대보전(極樂大寶殿)의 모습입니다.
 

 

 
배롱나무꽃과 종무소 건물의 단청도 예쁘게 조화를 이루는군요.


 
극락대보전(極樂大寶殿) 앞 공사가 한창 진행중인 새 대웅전 중창불사의 조감도입니다. 공사 기간은 금년 6월부터 11월까지라고 하니 늦은 가을이면 새로운 대웅전의 모습을 만나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한 기념으로 창건된 개태사는 논산8경 중의 하나로 고려 태조 왕건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여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사찰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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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 수정일 : 202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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