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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매화 만개한 아산 현충사

매화향기 가득한 현충사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다

2020.03.15(일) 11:50:43해송이송희(shreer@naver.com)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방화산 자락에 위치한 현충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정신과 위업을 선양하기 위한 곳으로 이순신 장군이 혼인 후 무예를 연마하며 호국의 기량을 기르던 장소이다.1706년(숙종 32년) 충청도 유생들이 숙종 임금께 상소하여 조정에서 이를 허락해 사당을 건립하였으며, 1707년 숙종임금께서 현충사(顯忠祠)란 액자를 하사하였다. 1868년(고종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현충사는 철폐되었으며, 1906년 을사늑약에 분노한 유림들이 현충사 유허비를 건립하였다. 일제 치하에서 이충무공 묘소가 경매로 일본인의 손에 넘어갈 지경에 처하자 우리 민족지사들이 ‘이충무공유적보존회’를 조직하고 동아일보사의 협력으로 민족성금을 모아 1932년 현충사를 중건하였다. 1966년 박정희 대통령이 성역화사업을 추진하여 1967년 본래의 1932년에 중건한 옛 사당 위편에 새로운 현충사를 준공하였고 이순신 장군 탄신일인 4월 28일을 기념하여 매년 정부주관으로 제전을 올리고 있다.
 -현충사 홈페이지에서
 


현충사는 무료입장이며 관람시간은 하절기(3월-10월)에는 09:00시~18:00시 사이, 동절기(11월-2월)는 09:00시~17:00시까지이며, 매주 월요일은 휴관합니다.
 

 
정문을 들어와 충무공이순신기념관을 지나면 현충사로 들어가는 문인 충무문(忠武門)이 나오는데, 이 문을 통과해야 비로소 현충사 경내로 들어가게 됩니다.
 

 
충무문을 지나면 연못이 있고, 그 옆에 이런 건물이 보이는데 바로 정려입니다. 정려는 충신이나 효자, 열녀에게 임금이 편액을 하사하여 그들이 살던 마을 입구에 세원둔 건물로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사표로 삼아 그 정신을 고취하고 본받도록 하기 위해 건립한 건물입니다. 이곳 현충사 정려에는 이충무공과 공의 조카 이완, 사대손 이홍무, 오대손 이봉상 등 네 분의 충신과 팔대손 이제빈의 효자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원래 정려는 동남향으로 정위치에 있었으나 현충사 성역화시 참배객들의 편의를 위하여 서향으로 방향을 바꾸어 해체·복원하였다고 하네요. 저 앞에 보이는 꼬부라진 나무도 홍매화인데, 아직 봉오리만 맺혀 있습니다.
 

 
정려를 지나 바로 매화향기 그윽한 이충무공의 옛집으로 달려갑니다. 옛집 앞의 홍매화가 활짝 피어 아리따운 자태를 자랑이라도 하듯 우뚝 서 있는데, 입장 시간인 9시를 조금 지난 시각인데도 벌써 전국에서 많은 사진 애호가들이 열심히 촬영을 하고 계시더라구요.
 

 
홍매화가 참으로 화사하게 피어 매향(梅香)과 함께 방문객들을 유혹하고 있네요.
 

 
홍매화 옆에는 청매화도 두 그루가 서 있는데, 청매화는 아직 개화상태가 50%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아요.
 


꽃말이 '고결, 정조, 결백'이라고 하는데 꽃말처럼 우아하고 고매한 느낌을 풍기고 있군요.
 

 
어느 단체에선가 모델을 동반하고 와서 촬영을 하고 있기에 양해를 구하고 같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동양적인 멋을 풍기는 매화가 한옥과 어우러지니 진가를 발휘하는 것 같네요.
 

 
청매화와 홍매화를 한 프레임에 넣어 봅니다.
 

 
이번에는 옛집 담장 오른쪽으로 돌아 만개한 샛노란 산수유와 함께 사진을 찍어봅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충무공 옛집 주위에서는 매화와 산수유가 같이 피어 아름다운 풍경을 즐길 수 있답니다.
 

 
저 담장 안이 이충무공이 혼인하여 살던 옛집입니다.
 

 
모델의 표정이나 자세가 프로답게 예뻐서 봄꽃과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옛집 옆에는 은행나무 고목 두 그루가 서 있는데, 가을에 오면 멋진 모습을 볼 수 있지요.
 

 
옛집 앞쪽에는 충무정(忠武井)이라는 우물이 있어요.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가족, 그리고 후손들이 1960년대까지 쓰던 우물인데 지금은 방문객들이 물을 마실 수 있는 곳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21살 때 결혼하였는데, 부인은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方震)의 무남독녀였다. 따라서 처가집이 자연스럽게 이순신 장군의 본가가 되었다. 현재 건물은 전통적인 한식 목조건물로서 안채만이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대대로 종손이 살아오다가 1969년 현충사 성역화사업 당시에 경내의 존엄성을 고려하여 이주하였다. 고택 뒤편에는 가묘(家廟)가 있는데 이곳에는 현 종손의 4대조까지의 신위(神位)와 함께 이순신 장군의 신위가 중앙에 모셔져 있다.
 -현충사 홈페이지에서
 
옛집 뒷뜰에는 이렇게 예쁜 장독대가 있고 그 주위에도 매화나무가 있습니다.
 

 
이제 옛집을 나와 현충사를 한 바퀴 돌아봅니다. 먼저 이충무공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현충사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현충사에 들어서기 전에 있는 충의문의 모습입니다.
 

 
현충사는 1706년 숙종 임금 때 건립되어 이순신 장군을 향한 추모의 향불이 끊이지 않았으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되어 그 자취가 사라져 버리고 유허비만 남게 되었다. 그후 일제강점기 때 ‘충무공묘소 위토 경매 사건’이 발단이 되어 전국민이 거국적으로 모은 성금으로 1932년 현충사를 중건(重建)하게 되었다. 이후 1967년에 박정희 대통령의 성역화 지시로 순한국식 콘크리트 구조로 된 현재의 현충사로 세워졌고, 기존의 건물은 서편 참배로 옆으로 이전하여 ‘구 현충사’라 부른다.
 -현충사 홈페이지에서
 


현충사에 모셔져 있는 이순신 장군의 영정은 월전 장우성 화백의 1953년도 작품으로 1973년에 국가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었다. 영정을 그릴 때 이순신장군과 친분이 있었던 유성룡(柳成龍)이 쓴 '징비록(懲毖錄)'이라는 책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용모에 관한 기록을 참고하였다. 내용은 '舜臣爲人 寡言笑 容貌雅飭 如修謹之士 而中有膽氣 忘身殉國 乃其素所蓄積也'(순신의 사람된 품이 말과 몸을 잊고 나라를 위해 죽었으니 이는 본래부터 수양해 온 소치라 하겠다)이다.
 -현충사 홈페이지에서


 
현충사에서 나와 우측으로 나 있는 저 다리를 건너면 호젓한 숲길을 산책하며 구 현충사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구 현충사로 가는 길, 이곳에도 산수유가 활짝 피었습니다.
 

 
저 앞에 보이는 건물이 구 현충사입니다. 길가에는 산수유, 매화, 목련 등 봄꽃 나무들이 많은데 매화와 목련은 아직 피지 않았군요.
 

 
구현충사는 숙종 32년(1706년) 아산 유생들의 청원으로 지어졌으나 고종 5년(1868년)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리게 되었다. 1931년에 이르러서는 덕수이씨 충무공파 종가의 채무로 이충무공 묘소의 위토(제사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농지)가 경매에 부쳐지자 정인보, 송진우, 김병로 등 민족지사들은 '이충무공유적보존회'를 결성하여 유적보호에 앞장 섰다. 채무 변제를 위하여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성금 모금운동이 펼쳐졌고, 온 국민의 호응을 얻어 채무를 변제하게 되었다. 채무를 변제하고도 돈이 남자 '이충무공유적보존회'는 헐렸던 현충사를 1932년 다시 짓고 사액(임금이 사당, 서원, 누문 따위에 이름을 지어서 세긴 편액을 내리던 일) 현판을 달았다.1966년 현충사 성역화 사업으로 현재의 사당을 다시 지으면서 이 위치로 옮겨졌다.
 -구 현충사 앞 안내판에서
 


구 현충사 앞에는 예쁜 진달래도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며 봄을 알리고 있네요.
 

 
처음 충무문을 들어서며 지나갔던 연못입니다.
 

 
연못 옆의 산수유가 너무 예뻐서 데리고 왔어요.
 

 
현충사 관람을 모두 마치고 주차장으로 나오니 건너편 숲에 왜가리들이 떼를 지어 앉아있는 게 눈에 띕니다. 왜가리 서식지인지 모르겠지만 예뻐서 담아보았습니다.

오늘날 이순신이 위대한 평가를 받는 이유는 그의 군사적인 위업을 떠나 보통 사람으로서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성인(聖人)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인류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잔혹하고 거대한 형태의 폭력인 전쟁이라는 상황을 수행하며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감당하였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 여러 사람들의 질시와 모함을 받아 파면당하고, 관리로서 받은 조정의 비합리적인 처우 등, 앞으로는 왜적과 싸우며 뒤로는 조정과 임금이라는 내부의 적과 맞서 홀로 버텼다. 또한, 어머니와 아들까지 연이어 전시에 잃고 설상가상 자신이 모든 걸 쏟아부어 육성한 정예군이 거의 궤멸수준으로 타격을 입은 상황에서 다시 일어나, 오랜 전쟁으로 단련된 수십 배의 적군에 맞서 출전이 곧 죽음이 확실시되는 절망적인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싸워 결국 이겼으며, 천재적인 능력과 노력을 발휘하여 임진왜란 당시 존망의 위기에 빠진 조국과 백성을 끝끝내 지켜냈다. 이순신은 이처럼 자신이 처한 참담한 상황에서 인간으로서 지닐 수 있는 이상과 펼칠 수 있는 능력의 극한을 보여준 위대한 인물이었다.
 -나무위키백과에서

코로나19 때문에 바깥 나들이 하기 마땅찮은 요즘, 아이들과 함께 현충사를 찾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애국충절 정신도 돌아보며 봄이 주는 선물인 자연의 향기도 마음껏 음미해 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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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 수정일 : 202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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