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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숨결을 찾아 떠나는 공주 공산성

공산성의 낮과 밤

2020.03.01(일) 01:36:21해송이송희(shreer@naver.com)

공산성(사적 제12호)은 백제시대의 대표적인 성곽으로 웅진백제(475~538)를 지킨 왕성이다. 금강이 흐르는 해발 110m 능선과 계곡을 따라 흙으로 쌓은 포곡형(包谷形) 산성이다. 백제시대에는 웅진성, 고려시대 공주산성, 고려시대 이후 공산성, 인조가 이괄의 난(1624)을 피해 산성에 머문 이후 쌍수산성으로도 불렀다. 조선 선조·인조 때 지금과 같은 석성(石城)으로 개축하였고, 이후 지속적으로 사용된 공산성에서 시대별 역사를 살펴 볼 수 있다. 백제인들이 산위에 왕궁을 지은 이유는 무엇일까? 성벽은 밖에서 오르지 못하게 쌓고[치성(雉城)], 남북에 두 개의 문루와 적에게 보이지 않는 출입문[암문(暗門)]을 만들었다. 공산성 옆의 공주 옥녀봉성(충청남도 기념물 제99호)은 흙으로 쌓은 성[퇴뫼식]으로 공산성의 보조왕성의 역할을 하였다.
 -(출처 공주시청 홈페이지)
 

 
공산성으로 가는 길, 입구에서 만난 산수유꽃에서 잠시 봄의 정취를 느껴봅니다.


 
공산성 입구에 매표소가 있습니다. 유료입장이지만 요금은 비싸지 않아 부담이 없습니다.
-이용시간: 09:00~18:00 (설날 및 추석당일 휴무)
-이용요금: 어른 1,200원, 청소년 800원, 어린이 600원(단체 20인 이상 1100원, 700원, 500원) 
-주차시설: 무료(승용차, 버스)
 

 
유네스코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지정된 공산성은 공주의 자랑일 뿐만 아니라 충남의 자랑이요, 나아가 우리 대한민국의 자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곽의 총 길이는 2660m(석성 1925m, 토성 735m)이고, 동서남북 네 곳에 문터가 확인되었는데,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가 있었고, 1993년에 동문과 서문을 복원하여 각각 영동루와 금서루로 명명하였다고 합니다
 -(출처 공산성 안내서)



입구에는 이렇게 비석군이 줄을 서 있습니다. 공주와 관련된 인물을 기리기 위한 비석들로 문화재 자료 제71호로 지정된 목사 김효성비,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된 제민천교(濟民川橋) 영세비(永世碑) 등이 있습니다. 위에 보이는 누각이 금서루(錦西樓)인데 4곳의 성문 중 서쪽에 설치한 문루였으나 유지(遺址)만 남아 있었는데 이후 성내로 진입하는 차도로 이용되다1990년에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출처 공산성 안내서)
 

 
공산성에 올라서면 성곽을 따라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는데 금서루를 기준으로 시계 방향 또는 반시계 방향으로 돌 수 있습니다. 저는 반시계 방형으로 돌기로 하고 우측으로 방향을 잡습니다. 어느 쪽으로든 한 바퀴 도는데 40분 정도 소요됩니다.
 

 
쌍수정을 향해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는데 앞에서 아이와 손잡고 다정하게 걸어오는 아빠의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앞서 걷는 여인은 깃발 속에 예쁜 실루엣을 남기네요.
 

 
쌍수정(雙樹亭)의 모습입니다. 문화재지료 제49호인 쌍수정은 조선시대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하여 일시 파천했을 때 5박 6일간 머물렀던 곳이라고 합니다.
 

 
쌍수정 앞에는 넓직한 터가 있는데 백제시대 건물지라고 하네요. 백제시대 식품이나 물품을 보관하기 위해 나무로 만든 지하저장고인 목곽고, 그리고 백제 연못(위 사진)도 있었다고 합니다. 연못이 마치 우물처럼 보이지요?
 

 
쌍수정을 지나 조금만 가면 공산성의 네 개의 문 중 남쪽으로 난 진남루가 나타납니다. 토성이었던 공산성을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다시 쌓으면서 건립한 건물로 조선시대는 삼남(三南)의 관문이었습니다.
 

 
성곽을 따라 나란히 걷는 연인의 모습이 다정스러워 보이는군요.
 

 
임류각지(臨流閣地)입니다. 임류각은 백제 동성완(東城王) 22년(500년) 왕궁의 동쪽에 건축한 건물로 이곳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라고 합니다.
 -(출처 공산성 안내서)
 

 
동쪽의 문에 해당하는 영동루(迎東樓)의 모습입니다. 이미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80년 건물 밑부분 구조를 발굴하고, 공산지(公山誌)의 2층 3칸 건물이라는 기록을 근거로 누각을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출처 공산성 안내서)
 

 
임류각(臨流閣)의 모습입니다. 임류각은 신하들의 연회장소로 사용되었던 건물로 1980년에 공산성에서 발굴 조사된 추정임류각지(推定臨流閣址)의 구조를 근거로 1993년에 새로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뒤에 보이는 작은 건물에는 세 개의 비석이 있는데 바로 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입니다. 정유재란 때 왜적의 위협을 막고 선정을 베풀어 주민을 평안하게 하였던 명나라 장수 이공(李公), 임제(林濟), 남방위(藍芳威)에 대한 사은 송덕비라고 하네요.
 -(출처 공산성 안내서)
 

 
공산성은 원래 백제의 토성(土城)었는데, 조선시대에 석성(石城)으로 개축되었다고 씌어 있군요.
 

 
이곳이 백제 토성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입니다.
 

 
어느덧 해가 넘어가고 성곽의 조명등이 불을 밝히니 공산성은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토성과 석성 전체 성곽에 조명이 밝혀지면 공산성의 밤의 진면목을 볼 수 있습니다.
 

 
불빛 속에 모습을 드러낸 문화재자료 제50호인 광복루입니다.
 

 
앞서 낮에 보았던 임류각과 명국삼장비인데, 불빛 아래에서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네요.
 


내려가면서 뒤돌아본 광복루의 모습이구요,



충남도기념물 제42호인 연지(蓮池)와 그 옆의 만하루(挽河樓), 만하루는 연지와 금강 사이에 세운 누각인데 강을 끌어당긴다는 뜻을 가진 이름이 재미있습니다.


 
충남도지정유형문화재 제37호인 공북루(拱北樓)는 공산성의 북문으로 선조 36년(1603년) 옛 망북루(望北樓) 터에 신축한 것으로 조선시대의 문루건축(門樓建築)의 좋은 예이며 강변에 위치하고 있어 강 사이를 왕래하는 남북통로의 관문이었다고 합니다.
 

 
언덕 위에 우뚝 솟은 공산성 정자의 모습이 조명을 받아 참 아름답습니다.
 

 
이제 처음 출발지였던 금서루가 시야에 들어옵니다. 공산을을 한 바퀴 돈 셈이지요.
 

 
입구에 내려와 처음 낮에 찍었던 위치에서 다시  한번 찍어봅니다. 낮과 밤의 분위기는 완연히 다르네요.

유네스코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공산성은 백제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지만 낮에는 낮대로, 밤에는 밤대로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즐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하여 관광명소로 손색이 없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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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 수정일 : 202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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