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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를 묻는 곳이 아닌 산 자를 위한 땅

자손을 황제로 만든다…천자이대의 ‘명당’

2020.02.23(일) 15:45:28장군바라기(hao0219@hanmail.net)

자손이 2대에 걸쳐 천자(황제)의 자리에 오른다는 '명당' 남연군묘 전경.
▲자손이 2대에 걸쳐 천자(황제)의 자리에 오른다는 '명당' 남연군묘 전경1

“인간은 죽어도 땅은 영원하리.”

지난 2018년 개봉했던 영화 ‘명당’의 대사 가운데 한 구절입니다. 땅의 기운이 모이는 혈장에 조상의 묘를 씀으로써 자손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영화에 등장했던 지관의 예언입니다. 영화에서 지관은 '천자이대지지(天子二代之地)'의 명당으로 충남 예산군 덕산면 가야산 자락을 제시하는데 현재 흥선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의 묘가 있습니다.
 
자손이 2대에 걸쳐 천자(황제)의 자리에 오른다는 '명당' 남연군묘 전경2.
▲자손이 2대에 걸쳐 천자(황제)의 자리에 오른다는 '명당' 남연군묘 전경2
 
흥선대원군은 지관의 예언에 따라 가야산의 절 ‘가야사(伽倻寺)’를 없애고 그 자리에 자신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이장했습니다. 이같은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었는지 아들 고종은 대한제국의 황제에, 손자인 순종은 2대 황제에 올라 이대천자를 배출했지만, “절터에 조상을 모시면 대가 끊긴다.”는 지관의 예언 또한 적중했으니 대한제국은 멸망했고, 절손의 비극도 함께 겪게 됩니다.
 
남연군묘는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로 배후에는 석문봉(653m)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가야산 정상인 가야봉(677m), 오른쪽에 옥양봉(621m)이 병풍을 두른 듯 펼쳐져 있습니다. 풍수에서는 이 같은 지형을 천황대제별인 북극성과 이를 호위하는 별인 '천을(天乙)'과 '태을(太乙)'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한편으로는 석문봉을 중심으로 3개의 봉우리가 균형 잡혀 늘어선 형태로 큰 봉황의 머리와 양 날개로 명당이 되었다고 합니다.
 
남연군묘에서 바라본 전경.
▲남연군묘의 뒤에서 바라본 전경, 탁트이면서도 산줄기가 조아리듯 감싸고 있다
 
이같은 풍수는 '장풍득수(藏風得水)'에서 유래되었는데, 생기가 바람을 만나면 흩어져 장풍은 바람을 감추고, 득수는 땅에 수기로 생기가 축적되면 복을 가져온다고 합니다. 이같은 장품과 득수의 장소가 명당인데, 산이 사방을 에워싸고 작은 하천들이 모여 산을 따라 흐르던 기(氣)가 혈을 이뤄 명당을 이루게 된다고 합니다.
 
남연군묘의 석등.
▲남연군묘의 석등
 
남녕군묘를 좌우에서 지키는 석양.
▲남녕군묘를 좌우에서 지키는 석양
 
남연구묘의 상석과 석등 무늬.
▲남연구묘의 상석과 석등 문양
 
남연군묘의 비문. 흥선대원군이 ?다.
▲남연군묘의 비문. 흥선대원군이 비문을 썼다
 
이곳에 집을 짓거나 묘지를 쓰면 복을 누린다는 믿음으로 조선건국과 함께 ‘한양천도’ 등 우리역사에서는 물론 지금도 우리 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마치 포대그린과 같이 언덕진 남연군묘에 올라 펼쳐진 전경을 조망하면 아주 먼 곳까지 시야가 탁 트이고 산줄기가 서로 이어져 감싸안고 있었습니다. 마치 만조백관이 조아리는 형상이라고 하는데 풍수에 문외한조차도 범상치 않은 지형임을 동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연군묘 앞에서 바라본 전경.
▲남연군묘 앞에서 바라본 탁트인 전경
 
그런데 명당임에도 약점이 있어 이곳의 풍수는 좌청룡이 완벽하지 않아 이대천자를 내지만 “외부의 공격에 어려움이 예고된다.”라고 하는데요, 일부 풍수가들은 이 때문에 “고종과 순종이 외세의 압박에 시련을 받다가 망국의 서러움을 당했다.”라고 비유하기도 한답니다.
 
남연군의 묘는 이장에 앞서 도굴의 위험도 예견되었습니다. 때문에 흥선대원군은 이를 방지하고자 철과 석회로 묘를 단단하게 다졌는데,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1868년 미국인의 재정지원을 받아 프랑스 신부의 안내로 도굴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조선에 통상을 원하던 오페르트 일행은 현재 당진군 신평면 행담도(서해안 고속도로 행담휴게소)를 통해 삽교천을 거슬러 올라와 덕산군청을 습격하고 남연군묘를 도굴해 유골 등을 협상의 담보물로 사용하려 했지만, 이장 당시부터 대비한 탓에 도굴에 실패했다고 합니다.

가야사 터 발굴 작업
▲가야사 터, 위편의 포대그린 같은 봉우리위에 남연군묘가 있다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은 인조의 셋째 인평대군 6대손으로 그의 묘는 경기도 연천에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남연군묘를 이곳 가야산으로 이장하는데, 당시 교통사정으로 경기도 연천에서 충남 예산까지 500리 길을 상여를 운구하는 것은 비용도 비용이지만 동원되는 인력 또한 대단했을 것입니다.
 
지역을 지날 때마다 그 지방민이 상여운구에 동원됐는데, 마지막 구간은 예산군 덕산면 광천리 남은들 주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그들이 매우 극진히 모시자 흥선대원군도 감복해 마을사람들에게 부친을 모셨던 궁중상여를 하사했다고 합니다.
 
구름차일을 친 용봉상여로 4귀에 용모양의 금박이 있고 중앙에 나무로 만든 동자상이 있습니다. 휘장은 검정, 노랑, 흰색 천을 사용해 근엄하며 호화스럽습니다. 현재 ‘남연들상여’라는 명칭으로 진품은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고 남연군묘에는 복제품이 전시중입니다. 
 
남연들상여를 보관했던 상여각. 현재는 복제품을 보관중이다.
▲남연들상여를 보관하는 보호각, 현재는 복제품을 보관 중이다
 
남연들상여
▲남연들상여 복제품, 전흥수대목장(무형문화재74호)과 배순화매듭장(무형문화재32호)이 참여했다

남연들상여 복제품                                
▲남연들상여 복제품
 
이 지역에는 남연군묘와 관련해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화가 난 미륵불이 대표적입니다. 흥선대원군이 가야사를 없애고 묘를 만들자 동북쪽으로 150m 떨어진 곳에서 가야사를 바라보고 있던 상가리미륵불(문화재자료 제182호)이 반대편으로 등을 돌렸다는 얘기입니다. 보관을 쓰고 보관의 중앙에 화불이 장식돼 실제로는 관세음보살이지만 미륵불로 불리고 있다고 합니다. 아기를 원하면 미륵불의 코를 떼어 가는 민간처방으로 훼손된 코를 보수한 흔적이 있습니다.
 
상가리미륵불.
▲상가리미륵불
 
흥선대원군이 가야사를 없앤 죄의식과 가야사의 은덕에 보답한다는 의미에서 남연군묘 맞은편 서원산 기슭에 보덕사라는 사찰을 새로 지어 보상해 주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도 합니다.
 
남연군묘를 이장하기 위해 폐사된 가야사의 발굴품.
▲남연군묘를 이장하기 위해 폐사된 가야사의 발굴품
 
예나 지금이나 땅은 우리에게 재산과 권력 등 많은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혈이 모여 혈장을 이루는 명당은 누구라도 탐내는 자리입니다. 봄의 기운을 받는 이때 죽은 자를 묻는 곳이 아닌 산자를 위한 땅인 천자이대지지의 남연군묘에서 명당의 기운을 받아보시면 어떨까요?
 
남연군묘에서 상하리 미륵불로 이어지는 산책길
▲남연군묘에서 상가리 미륵불로 이어지는 산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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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 수정일 : 202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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