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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은 학문의 중심지다

향토역사문화기행, 맹씨행단을 찾아서

2020.02.04(화) 19:13:36아산지기(isknet@hanmail.net)



맹씨행단
▲맹씨행단

2020년을 맞아 아산지역에 대해 좀 더 알고자 한 달에 한 번씩 향토역사문화기행을 하기로 하였다.
첫 번째 여행지로 향토문화연구학자인 이갑수 선생님을 모시고 아산 학문의 요람인 맹씨행단을 방문하였다.
 
고택
▲고택

맹사성고택은 고려시대 최영 장군의 부친인 최원직이 건축하였으며, 현존하는 고려시대 민가 중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그 당시 건축양식 등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사적 제109호 1963.1.21).
 
고택의 낮은 굴뚝
▲고택의 낮은 굴뚝

고려 말에는 나라가 가난하여 굶어죽은 백성이 부지기수였다.
맹씨고택은 밥을 하는 것조차도 마을사람들 보이기가 민망하여 굴뚝을 지붕보다 낮게 하여 연기를 아래로 배출하였다.
 
구괴정(삼상당)
▲구괴정(삼상당)

구괴정은 삼상당이라고도 불리는데 맹사성, 황희, 권진 세 정승이 각각 세 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어 구괴정이라고 한다. 세 정승은 이곳에서 자주 만나 정사를 논하고 백성을 살폈다.
 
쌍행수
▲쌍행수

맹씨행단의 '행단'은 공자가 은행나무 주변에 단을 쌓고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을 논하였다고 전해지는데 맹사성 정승도 이를 본받아 퇴임후에 고향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내겠다는 뜻으로 은행나무를 두 그루 심고 단을 쌓았다. 훗날 이곳이 맹씨행단이라 불려졌고 은행나무는 쌍행수라고 불리게 되었다.
 
행단
▲행단
 
현재 세계적으로 행단이 존재하는 곳은 이곳 아산 맹씨행단뿐이다. 이곳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학문을 논하였기에 아산 학문이 발전하게 된 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맹씨행단 기년관 교육장
▲맹씨행단기념관 교육장
 
아울러 주변에 훗날 1634년 설립한 정퇴서원이 있었는데, 정퇴서원의 '정'자는 조선 중기 개혁자 정암 조광조의 호를 '퇴'자는 조선시대 첫 번째 학술논쟁을 펼쳤던 퇴계 이황의 호를 따서 정퇴서원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서원에는 맹사성 부친인 맹희도 선생님과 정암 조광조, 퇴계 이황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제를 올리고 추모하였다. 아산 지역은 원래 서인학파가 학문을 하는 지역인데 동인의 영수인 퇴계 이황의 이름을 따온 서원을 짓고 학문을 배워왔던 특이한 지역으로 아산은 동인과 서인의 학문을 함께 공부해온 전국유일무인한 특성 때문에 감히 아산은 학문의 고장이라고 할 수 있다.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다. 아산시민으로서 정퇴서원의 문화유적이 하루속히 복원되었으면 한다.
 
맹씨행단 입구 솟을대문앞에서
▲맹씨행단 입구 솟을대문 앞에서
 
아산이 학문의 고장이라는 것은 조선시대 3대 학술논쟁 중 마지막 논쟁을 이끌었던 외암 이간 같은 훌륭한 유학자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온양군은 충청도 54개 군현 중 과거급제자를 2번째로 많이 배출하였다. 주변의 신창현은 11번째이고, 아산현은 19번째로 많이 배출해 현재 아산시를 구성하고 있는 온양군, 신창현, 아산현이 조선시대 과거급제자들을 많이 배출한 것만 보아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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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 수정일 : 202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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