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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 왕건의 어진이 있는 개태사를 찾아서

충청남도에 자리한 고려시대 왕실 사찰의 흔적

2020.01.23(목) 11:42:35계룡도령춘월(mhdc@tistory.com)

충남 논산에는 고려 태조 왕건의 어진이 있는 개태사가 있습니다. 논산 8경 중의 한 곳인 개태사(開泰寺)는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에 있는데, 그 개태사가 아니라 고려 태조 왕건이 지은 개태사, 지금은 그 흔적만 남은 개태사지를 찾아 보았습니다.
 

 
개태사(開泰寺)는 충남 논산시 연산면 계백로 2614-11(천호리 108) 천호산 기슭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 마곡사의 말사로 고려 태조 왕건(王建, 877~943)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 국태민안과 위민을 위해지었다고 알려진 개국 사찰로 창건 당시에는 궁궐에 버금가는 큰 사찰이었으나 왜구의 침략으로 무너지고 조선시대에는 계속 폐사되어 방치되어 오늘에 이르렀으며, 현 개태사는 근대에 들어 1934년 김광영 스님이 새로 건물을 지어 ‘도광사’라 하였다가 다시 ‘개태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현 개태사에는 고려 태조 왕건의 어진이 보존되어 있는데 현 개태사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개태사라는 사명을 가지게 된 것은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강제합병을 당해 나라를 잃은 시대에 왜구에 의해 절이 불타 사라지고 땅속에 묻혀 오랜 세월을 지낸 어느 날 김광영 스님의 꿈에 삼존불상이 나타나 이를 찾으면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원래의 개태사는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요?
위 항공 사진을 보면 왼쪽은 야트막한 산 아래 발굴한 흔적이 보일 겁니다. 거기서부터 오른쪽 아래의 현 개태사까지가 개태사의 자리라고 보고 있으니 그 크기가 어마어마하죠?
 

 
개태사가 자리잡은 이곳은 삼국통일의 운명을 건 마지막 일전이 두 번이나 벌어진 역사의 현장으로 김유신과 계백이 일전을 겨룬 황산벌이 근처에 있고, 그로부터 270년 후 후삼국의 패권을 놓고 왕건과 후백제가 다시 이곳에서 마지막 전투를 벌였다고 전해옵니다. 견훤은 아들 신검 일파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됐다 나주로 탈출해 고려군에 스스로 투항·복종을 다짐하고 당시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후백제와의 전면전에서 70세의 노구를 이끌고 전장에 나타나 후백제의 군세를 크게 흔들어 결국 승리에 일조하게 됩니다.
 
또한, 신검이 전투에 참가한 사이 견훤의 사위 박영규가 당시 후백제의 수도였던 완주를 점령하였고, 신검은 이에 황산으로 물러나 왕건과 일전을 벌이지만 결국 왕건에게 무릎 꿇는데 그 현장이 바로 개태사라고 합니다.
 

 
936년 9월 승리한 왕건은 왕위 찬탈이 본심이 아니고 동생들의 협박에 의한 것이니 살려달라는 신검을 살려두지만 견훤은 아비인 자신을 배반하고 후백제를 멸망에 이르게 한 아들 신검을 살려준 것에 대한 분을 못 이겨 등창을 앓다 죽었다 하는데, 그 장소가 천호산의 백제 시절 지명인 황산, ‘황산의 불사(佛舍)’였다고 합니다.

왕건이 견훤의 큰 아들 신검을 물리치고 삼한을 재 통일한 후 4년에 걸쳐 개태사를 지었는데 고려 태조 23년(서기 940) 12월 왕건은 친히 법요식에 참석하여 올린 발원문에는 후백제와의 중요한 전투와 최후 승리까지의 기록, 개태사를 창건하는 이유와 염원을 담아 “…부처의 성력(聖力)이 꺼지지 않는 것에 보답하고, 산령(山靈)의 도움에 수응(酬應)하기 위해서 특별히 사국에게 명하여 새 연궁(蓮宮)을 짓게 하였으니, 이에 산 이름을 천호산(天護山)이라 하고, 절 이름을 개태사(開泰寺)라 하노라. 우리의 소원은 부처의 위력이 우리를 돕고 하늘의 힘이 늘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바라는 바”라고 했습니다 (최자, '보한집').
 

 
개태사지에서는 보존 상태가 양호한 고려시대의 최고급 장대석 대형 석축 2기가 남아 있으며, 8동의 건물 흔적과 위치가 확인되었습니다
 

 
개태사는 전성기엔 천여 명의 승려가 상주하였으며,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 개태사지 주변에는 6km에 달하는 토성이 있었고, 승병이 주둔하여 사찰을 수비하였다고 하니 당시 절의 규모와 위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개태사는 전략적 교통 요충지에 창건되어 유지되어 오던 절로 전쟁 때마다 참화를 겪게 되는데, 고려 우왕 2년부터 14년까지 3차례에 걸친 왜구의 침입으로 방화 약탈을 당하고 1376년(우왕 2) 백인계 장군(원수)이 왜구와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하였으며 최영 장군이 물리쳤으나 복구되지 못했고, 임진왜란 때도 전투 피해를 입었으나 이씨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 눌려 복구되지 못하고 폐찰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지금의 개태사지는 논과 밭, 그리고 담장에 깔려 있으며 지난 1986년부터 주변의 민가를 이주시키고 2016년까지 6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해당 조사를 통해 개태사지의 전체 건물 배치를 모두 확인해 향후 개태사의 옛 모습을 재구성할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되었다고 합니다.
 

 

 
개태사지에서 발굴된 대표적인 유물로는 개태사지석불입상(보물 제219호), 개태사 오층석탑(문화재자료 제274호), 금동대탑(금동탑 국보 제213호), 비로자나석불(유형문화재 제39호) 개태사철확(민속자료 제1호), 개태사지석조(문화재자료 제275호), 청동반자(靑銅飯子 - 開泰寺靑銅金鼓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등 다양한 유물이 당시 개태사의 역사를 증명해 주고 있는데, 그중 개태사에서 도난당했다고 주장하는 금동대탑(국보 제213호)은 삼성리움미술관(삼성문화재단)에서 소유하고 있습니다.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보물 제219호), 충남역사문화원 자료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은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태조 왕건이 개태사를 건립과 동시에 조성되어 940년(태조 23)에 완공되었다고 합니다. 삼존불 중 본존 불상은 약 4.15m, 좌협시 보살입상은 약 3.5m이며 우협시 보살입상은 약 3.21m의 크기입니다.
 

 
본존상은 편단우견식 착의로 넓은 방형 연화대좌 위에 서 있고, 머리에는 폭이 좁고 높은 형태의 육계가 표현되어 있으며 나발은 마모되어 일부만 남아 있으나 얼굴은 크고 둥근 편이다. 본존상은 이마가 유난히 좁고 눈매가 길며 두 뺨이 넓으며 코는 길이가 짧고, 귀는 상당히 길며 귓바퀴가 얼굴 방향으로 달팽이처럼 휘어져 있는데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습니다. 얼굴에 비해 어깨는 좁고 가슴 부분은 평평하고 목이 굵고 손이 너무 커서 느낌이 낯설게 보입니다.
 

▲개태사오층석탑(문화재자료 제274호),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자료
 
개태사 오층석탑(開泰寺五層石塔)은 1985년 7월 19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274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는데, 고려 태조 왕건이 창건한 개국사찰(開國寺刹) 개태사지(開泰寺址) 경내에 있던 것을 1946년 승려 김광영(金光榮)이 새로 지은 개태사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탑의 높이는 4.69m 폭 1.8m이며 이건(移建) 당시 높직한 바닥돌 위로 기단(基壇)이 없어진 채 옮겨졌는데, 아래 부분이 일부 없어져 완전한 제 모습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5층의 탑신(塔身)만이 차례로 쌓여 있으며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기 하나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탑신에는 우주(隅柱, 모퉁이에 세운 귀기둥)를 새겨 넣었고 옥개석에는 4단의 옥개받침과 탑신괴임이 각각 나오게 조각하였는데, 조각 기법이 소박하고 단아한 기품을 느낄 수 있는 석탑으로, 상륜부(相輪部)는 노반(露盤 탑의 꼭대기 층에 있는 네모난 지붕 모양의 장식)과 연꽁 봉오리 형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개태사철확(충남 민속문화재 제1호),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소장 자료

대형 쇠솥인 ‘개태사 철확(鐵)’은 삼존불과 더불어 왕건이 창건할 당시부터 전해 내려오는 귀중한 유산으로 개태사 철확은 원반 모양으로, 직경 289cm, 높이 96cm, 둘레 910cm로 엄청난 크기인데 한 번에 밥을 지어 스님 3,000여 명이 먹을 수 있는 솥으로 태조 왕건이 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습니다.


 
후백제가 왕건에 항복하고 견훤이 생을 마감한 곳, 고려의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 936년부터 4년여에 걸쳐 태평시대를 염원하며 건립한 국찰(國刹)로 황산은 하늘이 보호한다는 '天護山(천호산)'으로 사찰은 평안함이 열리라는 '開泰寺(개태사)'로 명명(命名)하고 보물 제219호로 지정된 삼존불상과 태조의 진영을 봉안한 진전 사찰로서 태조의 통일 위업을 상징하는 고려 왕실의 대가람이었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이 창건한 개국 국립 대사찰 개태사지(충남도 기념물 제44호)는 고려 태조 왕건의 모든 것이 담긴 유적으로 한강 이남에 존재하는 고려시대 왕실사찰 유적 중 역사적으로 남한 내에서 찾아보기 힘든 단연 최고의 유적으로 국가사적으로의 승격 지정되어야 하고 복원도 하루 속히 이루어져 충청남도의 자랑스러운 유적으로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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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 수정일 : 202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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