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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각 지역의 3.1운동사(선장면)

아산의 3.1운동의 절정…대미 장식

2019.01.14(월) 14:08:29온양신문(ionyang@hanmail.net)

아산의 3.1운동의 대미를 장식한 것은 44일 선장면의 독립만세운동이었다.

선장면의
3.1운동이 가장 늦은 44일에 폭발한 것은 그 날이 선장 장날이었기 때문이다. 선장면의 3.1운동은 그 격렬함과 규모에 있어서 아산지역 3.1운동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선장 군덕리 시장

▲ 선장 군덕리 시장


선장면은 아산 내에서 바닷가와 접해 있는 서쪽지역이고, 위로는 인주면과 맞닿아 있다. 선장은 면내 모든 동리가 포구의 영향권 아래 있다고 할 정도로 지리적 조건이 그들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경우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중에서도 선장면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군덕리를 예를 들어 설명해볼 수 있다
. ‘선장면향토지를 보면 현재의 군덕1리는 선창1(큰 선장마을)에 있던 장터가 1917년 선장항포구와 가까운 이곳으로 옮겨오고 나서 장터마을이라고 불리게 됐는데, 선장장에는 당진군 우강면, 인주면, 신창면, 도고면 사람들이 모여들곤 했다고 한다.

포구에는 생선이나 해산물 등을 실은 배가 드나들었고 사람들이 이 수산물을 떼어다가 장터에서 판매했다
. 장터마을이 가장 번성했을 때에는 일제강점기였다고 한다. 이 당시 150가구 이상이 거주했고, 위에서 말한 인천기선회사 외에도 해양사, 마루보시 등과 같은 기선회사도 있었다.

그리고 이 기선회사들은 여객이나 화물을 나르는 해운업을 담당했다
. 인천에서 싣고 온 짐은 이곳에서 마차로 옮겨 실어 천안, 홍성, 광천 등으로 운반되었는데, 그로 인해 마차도 많이 드나들었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신탁회사 소유의 땅에서 수확한 벼를 모두 이곳으로 옮겨와 정미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 때문에 마을에 4개의 방앗간이 있었고 4곳 모두 분주하게 작업이 진행됐을 뿐만 아니라, 정미 과정을 마치면 검사원들이 일렬로 늘어서 검사를 했고 이 쌀을 배로 인천, 군산, 일본 등지로 실어 날랐다고 한다.

아마도 충남선
(장항선) 부설 이후로 추정되는데, 인근 도고면으로 쌀을 나르는 트럭도 있었다.

이렇듯 장터마을은 위치상으로 배가 드나드는 등 교통이 편리하고 배후에 평야도 있고
, 그로 인해 수산업, 여객 해운업, 정미업 등이 발달했으며 그 외 상업과 유흥업 등도 부수적으로 따르기 마련이었다.

그렇다면 이는 곧 사람들이 모여들기 좋은 위치이고 게다가 노동력도 많이 필요했으니 주민구성이 다양해질 수밖에 없었다
. 면의 중심지가 이와 같은 성격을 보였고 면내에 일본인의 왕래가 많았음을 의미하며 이는 이민족의 지배를 몸소 체험하는 여러 계기를 제공했을 것이라 보인다.

여기에다가 대대적인 운동을 일으킬 수 있었던 운동주체의 상황을 들면
, 충남 서북부 해안가에 천도교의 영향이 강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비슷한 시기, 아산뿐만 아니라 예산군 고덕면 한내장터(43), 신례원(43)에서 지역의 천도교도들이 운동에 참가하고 있었다.

한내장터의 시위는 약
1천여 명이 모인 대규모의 것으로, 헌병대의 무차별 사격으로 사상자 가 발생하기도 했다. 일제 관헌기록에는 명시돼 있지 않으나 이 시위에는 천도교인 마기상(馬驥賞, 1898~1953)111)의 영향이 있었다고 한다.

한편 신례원에서도 같은 날 시위가 있었다
. 주민 150여명이 독립만세를 부르는 독립운동이었다. 이 운동을 주도한 이는 오가면 노교리 사람 천도교인 문병석이었다. 그는 3.1운동 조직 지령을 마기상으로부터 전달받았다. 그리고 장날에 맞춰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문병석은 이 사건으로 신례원주재소에 끌려가 3일간 구류를 살면서 심한 고문을 당해 짝귀가 되고 얼굴이 곰보가 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두 지역의 운동에는 천도교도의 영향이 짙었는데
, 이는 선장의 3.1운동으로 이어졌다. 선장의 3.1운동의 주동자 중에서 이러한 측면에서 관심을 끄는 인물은 정수길(丁奎熙, 1895~1979)이다. 그는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했던 정태영(1859~1922)의 아들이다.

정태영은 당진군 우강면 신흥리에서 출생해 삽교천 건너 마을인 선장면 군덕리로 이사해 동학에 입도했다
. 18941월 북접대도주 해월 최시형으로부터 직강에 임명됐고, 그해 7월에는 위접사로 임명되는 등 일찍이 지역의 동학 지도자로 주목받았다.

그는 농민전쟁이 패배로 끝나고 정부군에게 쫓기게 됐으나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 이후 예산군 대술면 쪽으로 피신했고 그곳에서 장남 정수길을 낳았다.

정수길도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고
, 190713세의 나이에 천도교에 입교했다. 그리고 1908년 신창 사립 신민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익히기도 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마기상
, 문병석, 정수길 그리고 당진 출신의 정환석 등은 1920년대 이후 천도교 예산교구를 이끌었던 인물들이다.

정환석은 민족협동전선 기구인 신간회의 예산지부장을 맡아 활동했다
. 1931426일에는 천도교 예산종리원에서 원장 문병석의 진행 아래 예산지역 조선농민사 창립총회를 개최했는데, 정수길이 이사장에 취임했고 마기상 등은 이사로 참여했다.

마기상의 묘비에 따르면 그는 장흥 마씨로
, 초명이 기상이고 자는 학순, 호는 용남이다. 마기상은 청소년시절 고덕면의 용리서숙의 김사홍 선생에게 한문을 배우고 덕산보통학교에서 신식교육도 받고, 19세 되던 1916년에 국권회복의 의지를 안고 천도교에 입교했다고 한다.

1919
, 그는 천도교 조직으로부터 3.1운동을 전파하기 위한 연락책으로서의 사명을 받았고 일설에 의하면 생선장수로 가장해 청어의 뱃속에 밀지를 숨겨서 전했다고 한다. 그리고 직접 향리인 고덕면 한내장터의 만세운동에도 참여했다. 이러한 서술로 미루어보아 그는 3.1운동 당시 이미 적극적인 천도교 활동가였다.

선장면 범죄인 명부

▲ 선장면 범죄인 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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