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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영규대사 순의실적비’를 참배하고

임진왜란의 또 다른 영웅이었던 영규대사님을 흠모하면서

충남 공주시 계룡면 유평리 산 5

2024.06.20(목) 16:53:25 | 홍경석 (이메일주소:casj007@naver.com
               	casj007@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영규대사 영정각
▲ 영규대사 영정각

영규대사(靈圭大師)는 임진왜란 당시 의승병을 일으켜 조헌(趙憲)의 의병과 함께 청주전투와 금산 전투에 참전한 승장이다. 1592년 충청도에서 의승 800여 명을 모아 조헌의 700 의병과 함께 청주성에서 일본군을 물리쳤고 금산에서 전사했다.

홍살문과 영규대사 영정각
▲ 홍살문과 영규대사 영정각
 
영규대사가 참가한 이 전투들은 의승군의 충의와 기백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영규대사는 충청남도 공주 출신으로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속성은 박씨(朴氏)이다. 법호(法號)는 기허(騎虛), 법명(法名)은 영규(靈圭)이다. 영규는 계룡산 갑사(甲寺)에서 출가하였고, 청허 휴정(淸虛休靜, 1520∼1604)의 법을 전해 받았다.

영규대사를 닮은 듯한 소나무의 기백
▲ 영규대사를 닮은 듯한 소나무의 기백
 
영규대사가 공주 청련암(靑蓮庵)에 있을 때인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는 3일 동안 통곡한 뒤 충청도에서 800여 명의 의승군을 모았다. 당시 그는 “우리들이 떨쳐 일어남은 조정의 명령이 있어서가 아니다. 만일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 자는 우리 군에 들어오지 말라”라고 했다고 한다.

관리가 제대로 안 되어 잡초만 무성한 ‘의병장 기허당 영규대사 순의실적비’
▲ 관리가 제대로 안 되어 잡초만 무성한 ‘의병장 기허당 영규대사 순의실적비’

영규대사가 이끄는 승군은 의병장 중봉(重峯) 조헌(趙憲, 1544∼1592)을 따르는 700 의병 및 관군과 함께 청주성을 공격했다. 이 청주전투에 대해 당시 실록에서는 "충청감사 윤선각(尹先覺)이 청주로 진격하여 성을 포위하자 적군 600명이 나와서 포를 쏘아댔습니다. 공주에 있던 승려 영규가 승군 800명을 거느리고 함성을 지르며 성으로 돌입하자 아군이 승세를 타고 적의 수급 51과를 참획하였는데 남은 적은 밤을 틈타 도망쳤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거북이도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 거북이도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이는 8월 초 청주성을 수복할 때 영규가 이끈 의승군의 공적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이어 조헌이 전라도로 향하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군대를 공격하려 하자, 영규는 관군과의 연합 작전을 위해 공격 시기를 조금 늦추자고 하였다.

영규대사의 임진왜란 당시 업적 기록
▲ 영규대사의 임진왜란 당시 업적 기록

그러나 조헌이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자 영규는 그를 혼자 죽게 할 수 없다고 하며 금산 전투에 참가하였다. 조헌의 의병과 영규의 의승군은 1592년 8월 18일 금산 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 모두 전사했다. 선조는 청주성 전투의 승전 소식을 듣고, 영규에게 당상의 벼슬과 옷을 내렸다.

영규대사 묘 입구와 안내문
▲ 영규대사 묘 입구와 안내문

하지만 영규는 하사품이 도착하기도 전에 금산 전투에서 순국(殉國)하였다. 청주성 전투와 금산 전투에서 승장 영규의 활약은 의승군의 충정과 기백을 조야(朝野)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영규대사는 금산의 종용사(從容祠)에 제향되었다.

영규대사 묘
▲ 영규대사 묘

훗날 그의 문도(門徒)인 대인(大仁) 등이 금산 남쪽 진락산(進樂山) 기슭에 영규의 영정을 봉안한 진영각(眞影閣)과 비를 세웠다. 또한 1738년 영규대사는 밀양 표충사에 청허 휴정, 사명 유정(四溟惟政, 1544∼1610)과 함께 제향되었다. 충남 공주시 계룡면 유평양달길57-4(유평리323-1)에 위치한 임진왜란 당시 혁혁한 공헌을 세운 의병장 기허당 영규대사 순의실적비(義兵將騎虛堂靈圭大師殉義實跡碑)를 찾았다.

영규대사 묘의 위엄
▲ 영규대사 묘의 위엄

영규대사 영정각을 지나 영규대사 순의실적비에 올랐다. 하지만 평소 관리가 제대로 안 되었던지 아무튼 잡초만 무성하여 마음이 많이 불편했다. 이어 영규대사 묘를 참배했다. 그리곤 새삼 임진왜란 당시의 또 다른 영웅이었던 영규대사님을 흠모하면서 새삼 고인의 극락왕생을 발원했다. 기허당 영규대사 순의실적비 부근을 정비하고 제대로 관리까지 잘 한다면 전국적 명승지와 관광지로도 손색이 없을 듯 보였다. 저만치 계룡산 정상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면서 “맞다”고 화답했다.

영규대사 묘 앞에서 고인의 극락왕생을 비는 홍경석 기자
▲ 영규대사 묘 앞에서 고인의 극락왕생을 비는 홍경석 기자

 
영규대사 묘
충남 공주시 계룡면 유평리 산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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