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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지하 125m서 매몰…15일만에 기적처럼 생환

격동의 충남 100년 - 김창선(양창선)의 구봉광산 매몰사건

2023.11.26(일) 23:17:53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deun127@korea.kr
               	deun127@korea.kr)

국내 최대 금광이었던 구봉광산 전경. /한국학중앙연구원

▲ 국내 최대 금광이었던 구봉광산 전경. /한국학중앙연구원


의료진이 구봉광산에 구출된 김창선씨의 건강상태를 확인하고 있다. 대한뉴스 제639호 화면 캡처. /e영상역사관

▲ 의료진이 구봉광산에 구출된 김창선씨의 건강상태를 확인하고 있다. 대한뉴스 제639호 화면 캡처. /e영상역사관



1967년 8월 청양 구봉광산서 붕괴사고 발생
30대 광부 홀로 도시락과 지하수로 버텨 
통신복구해 사무실에 “나 살아있다” 전화
외신 취재 열기 속 정부 차원 구조 독려



청양 칠갑산 허리를 차지하고 있는 구봉광산은 충남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금을 보유한 이름 그대로 ‘노다지’였다. 1949년부터 1970년까지 구봉광산에서 캐낸 금이 1113만 6100그램이었으니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구봉광산 일대는 1년 내내 각지에서 모여든 투기꾼과 한량들로 들끓었고 술집들이 즐비했다. 미국에서 금을 찾아 서부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던 ‘골드러시’를 방불케 했다. 

그런 분위기가 뜨겁던 1967년 8월 22일, 당시 35세의 광부 김창선씨는 부인이 싸준 도시락을 들고 가벼운 마음으로 출근을 했다. 그리고 그날 작업으로 지정받은 지하 125미터 막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곡괭이를 들고 막장 끝을 파내는 데 갑자기 갱이 무너져 내렸다. 그때가 12시 40분.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 한참을 정신을 잃고 있다가 눈을 떠 보니 사방이 캄캄한 암흑이었다. 광산 사무실은 곧바로 사고를 파악하고  관계 기관에 보고를 했지만 그것은 으례적 절차였을 뿐 사실상 구조에 대한 희망을  갖지 않았다. 그렇게 그 무렵에는 광산 매몰 사고가 많았고 거의 구조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또한 구조장비나 기술도 낙후돼 있었다. 

그러나 김창선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북한에서 남하하여 해병대에 입대 통신병으로 근무한 바 있다. 그래서 인내력과 위기에서 생존하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부인이 싸준 도시락을 아껴 한 수저의 밥으로 식사를 때웠고 천정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로 목을 축였다. 그러다 기적적으로 흙속에 묻힌 전화기를 발견했다. 사무실이나 갱도 사이에 연락용으로 설치된 전화기였다. 해병대 통신병 출신인 그는 어둠속에서 전화기의 선을 잇고 부서진 곳을 조립을 하는데 성공했다.  전화기의 복원이 그를 살리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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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사무실로 전화를 돌렸다. 때마침 사무실 직원이 그 시간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수화기를 들었다. “나 살아 있다” 수화기에서 또렷한 음성이 들려 왔다. 정말 기적 같은 장면이었다. 때마침 KBS대전방송국 오철환기자가 사고 취재를 왔다가 이 현장을 목격했다. 그리고는 기자의 정신으로 지하에 갇힌 김창선씨와 통화를 했고 그것을 녹음하는데 성공했다. 기자가 지하에 갇힌 김창선씨에게 “꼭 하고 싶은 말씀이 있느냐?”고 묻자 그가 대답했다. “우리 정애(딸)야, 경복(아들)과 싸우지 말고 사이 좋게 지내라” 생사의 절박한 순간에 그가 꼭 하고 싶은 말은 자식들의 화목이었다.

이 단순하고 소박한 그의 목소리는 그날 저녁 전국 뉴스를 타고 생생하게 전해 졌다. 그러자 전국민의 관심은 그의 생존에 쏠렸고 빨리 구조돼야 한다는 여론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심지어 그해 6월에 치루어진 국회의원선거가 금품 부정선거였다며 야당과 대학생들의 반발 시위가 계속되는 등 정국이 매우 시끄러웠는데 김창선씨의 광산 매몰 사건이 정국 소요까지 잠잠하게 할 정도였다.

그렇게 5일, 10일, 자꾸만 초조하게 시간이 지나자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 비서관을 현장에 파견, 구조작업을 독려하게 했으며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전국의 사찰과 교회에서는 그의 무사 귀환을 비는 기도회가 열리기도 했으며 미국의 유명한 구조 전문가가 급히 현장으로 달려왔다. 서울에 파견돼 있던 외신 기자들도 현장 취재에 열을 올리기까지 했으며 일본 NHK방송은 굴착작업을 하는 현장 중계를 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김창선씨는 점점 기력을 잃어 가고 있었으며 “너무 배고파 죽겠다. 빨리 죽고 싶다”는 절망적인 목소리까지 흘러 나왔다.

구봉광산에 매몰된 김창선씨 구출을 보기 위한 인파 모습. 대한뉴스 제639호 화면 캡처. /e영상역사관

▲ 구봉광산에 매몰된 김창선씨 구출을 보기 위한 인파 모습. 대한뉴스 제639호 화면 캡처. /e영상역사관


마침내 국민의 간절한 염원속에 9월 6일 밤 9시쯤 땅을 파내려 가던 구조대가 매몰된 갱도 현장에 도착, 죽음처럼 지쳐 쓰러진 김창선씨를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매몰된지 15일 9시간만이었다. 광산에 운집해 구조를 기다리던 취재진과 지역민들이 일제히 ‘만세’를 외쳤다. 그는 곧바로 헬기에 실려 서울로 떠났으며 병원에 입원, 긴급 진료를 받았다. 평소 62㎏이던 몸무게가 45㎏으로 빠질 만큼 야위었으나 특별한 건강의 위험은 없었다. 병원 인근에는 그의 귀환을 환영하는 인파로 북적였으며 생환을 축하하는 화환도 줄을 이었다. 전국에서 위문금도 답지했다.

그는 병원에서 정신을 회복하자 자기 이름을 ‘양창선’이 아니라 ‘김창선이니 이름을 바로 잡아 달라’고 호소했다. 그가 북한에서 남하하여 새로운 주민등록을 할 때 면서기가 양창선으로 잘못 기록하는 바람에 군대에서나 사회에 나와서나 ‘양창선’으로 통했다. 심지어 구봉광산 매몰 때도 전국 언론에 ‘양창선’으로 발표되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그는 퇴원하여 이것 저것 손을 대며 새로운 삶을 시도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게 시골에 묻혀 살다 지난해 1월 9일 부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보유한 지하 생존 15일 9시간은 그후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의 박승현씨 15일 17시간으로 기네스북 기록이 깨졌다.

한편 구봉광산 일대는 충남도립파크골프장이 조성된다. 충남도는 지난 3월 청양군, 대한파크골프협회와 ‘대한파크골프협회 충남도 이전 업무협약’을 체결함으로써 전국 최고 파크골프장의 탄생을 예고했다.
/변평섭전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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