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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칼럼

참스승 ‘밝맑 이찬갑’ 선생

내포칼럼-백승종 전 서강대 교수

2022.09.08(목) 11:22:27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deun127@korea.kr
               	deun127@korea.kr)

참스승밝맑이찬갑선생 1



홍성 풀무농업기술학교 창립자
평민·농민 교육의 중요성 일깨워 

“깨어있는 정직·순수한 시민 교육”
날마다 ‘밝고 맑은’ 일상생활 강조


충청남도 홍성군 홍동면 팔괘리에 가면 풀무고등농업기술학교가 있다. 이를 줄여서 풀무학교라고 부르는데, 우리나라 대안 교육의 선구이자 대표적인 학교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풀무학교 졸업생들 덕분에 홍동면 일대는 우리나라 최고의 유기농업 지역으로 손꼽힌다. 교육의 힘이 정말 크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풀무학교는 1958년 4월에 문을 열었으니, 한 그루 나무로 비유하더라도 어언 65년이나 된 성목(成木)이다. 처음 학교를 연 것은 두 분 선생님이었다. 한 분은 그곳 출신인 주옥로 선생이요, 또 다른 한 분은 멀리 평안도 정주에서 내려온 이찬갑 선생이었다. 두 분은 평생을 오직 한 가지 화두를 품고 사셨다고 한다. “어찌하면 이 땅에 진정한 의미로 새 나라를 세울 수 있을까?” 

오래전에 한 작은 인연이 닿아 나도 그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쳤다. 그때 나는 이 학교의 창립자인 두 분의 행적을 기록한 글을 찾아서 학생들과 함께 읽고 뜻을 되새기기도 하였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한 구절이 있다. 이찬갑 선생의 유언이었다. 

“내가 교단에서 쓰러져 죽거든 가족에게도 알리지 말라. 풀무학교 뒷동산에 한 길 땅을 깊이 파서 선 모양 그대로 나를 묻어라. 그리고 나의 주검 위에 한 그루 나무를 심어서 이미 죽은 내가 무럭무럭 자라날 어린나무의 거름이 되게 하라. 묘비 같은 것은 세울 필요가 없다.”

이 얼마나 굳센 결의에 찬 스승의 거룩한 말씀인가. 자신은 교단에서 쓰러질 때까지 학생들을 열심히 지도할 것이라고 다짐한 것이요, 죽은 다음에도 학교 후원에 선 채로 묻혀 자라나는 한 그루 어린나무의 자양분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가족도 잊고 살 것이며, 사후에도 한 그루 나무가 되어 정든 학교를 지키겠다는 피어린 각오가 묻어난다.

이찬갑(1904-1974) 선생은 그분 세대가 모두 그러하였듯 고난의 한평생을 사셨다. 어린 시절에 일제 강점기의 불운을 겪었고, 조국 해방을 맞았다고는 하지만 곧 동족상쟁의 비극과 독재 정권의 폭력과 만성적 가난에 시달렸다.

지금처럼 평화롭고 풍요로운 시대를 사는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인고의 세월이었다. 온 민족이 고난의 질곡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이찬갑 선생과 같은 선각자들은 오직 교육을 통해서만 우리 사회의 미래를 개척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혼탁한 세상 물정을 목격하고, 이찬갑 선생은 모든 시민이 순수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일깨우는 교육이 급선무라고 판단하였다. 풀무학교 개교식에서 선생이 다짐한 바는 일류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중요한 일도 아니고, 권력과 재물을 움켜쥔 성공을 약속하지도 않았다. 부디 고난에 찬 한국역사의 짐을 두 어깨에 떠메고 갈 새로운 평민이 되자고 다짐할 뿐이었다. 진실한 평민으로서 날마다 밝고 맑은 일상생활을 하는 것, 무거운 역사의 짐까지도 명랑하게 웃으며 지고 가는 사람을 키우고 싶다고 말하였다.

이찬갑 선생 자신이 바로 그런 평민이 아니었을까도 싶다. 마을 길을 걷다가도 선생은, 행여 농민의 손발을 다치게 할까 봐 땅바닥에 함부로 내버려진 유리 조각을 주어 말없이 호주머니에 넣었다. 세상 물정에 되바라지지도 못하고 남을 기어이 이기려는 경쟁심도 없는 사람이 바로 이찬갑이었다. 모두가 그리워하는 진정한 스승은 그와 같은 “바보”의 모습일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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