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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홍성 이응노의 집에서 예술의 큰 줄기를 만나다.

변화하고 독창적이지만 평화를 그리는 고암 이응노

2022.09.06(화) 16:17:46 | 보라공주 (이메일주소:eyeful3535@naver.com
               	eyeful3535@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가을은 전시나 공연을 보러 다니기 좋은 시기입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면 다른 사람들은 가을을 탄다고 말하지만, 감수성이 높아지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감수성이 풍부하다 보면 예민해질 수도 있지만 창의적이고,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볼 줄 알며, 풍부한 상상력을 가져볼 수 있습니다. 가을은 누구에게나 감수성을 자극하고, 그 예민함으로 전시나 공연을 보기에 좋은 계절입니다. 푸른 가을, 충남 홍성이 고향인 고암 이응노 화백을 만나기 위해 이응노의 집을 찾았습니다. 

홍성이응노의집에서예술의큰줄기를만나다 1▲홍성 이응노의 집


전시장을 둘러보기 전 입구에서 '스탬프를 찾아 떠나는 박물관 미술관 여행'에 참여했습니다. 이 행사는 코로나 장기화로 위축된 관람 문화를 활성화하기 위해 마련되었습니다. 대전, 세종, 충남에 소재한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관람한 후 스탬프를 10개 모으면 기념품을 받을 수 있습니다. 10월 30일까지 진행된다고 해서 참여하고 있습니다. 

홍성이응노의집에서예술의큰줄기를만나다 2▲스탬프를 찾아 떠나는 박물관 미술관 여행


고암 이응노의 집에서는 9월 18일까지 '고암 이응노의 드로잉 : 늘 새로움을 향한 실험정신' 전시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이응노 화백의 그림에서 그의 삶을 연동해서 볼 수 있어 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듯합니다. 그의 작품이 시대에 따라 많이 달라 보이지만 내용은 모두 서민 생활의 애환을 담고 있습니다. 죽는 날까지 다루었던 군상에서는 사람마다 다른 동작을 그려 보이면서 민중의 삶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홍성이응노의집에서예술의큰줄기를만나다 3▲서민의 애환을 담고 있는 이응노 화백의 그림


제1전시실 '대나무 잎에서 꽃 피어난 사람들'에서는 1904년 홍성군 홍북면 홍천마을에서 태어난 이응노의 소년기부터 1920년 아버지의 소개로 충남 당진의 염재 송태회에게 수묵화와 사군자의 기초를 배우면서 그렸던 그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서당 훈장을 하던 이응노의 아버지는 그림 그리는 것을 반대했었지만 그림을 그려 집안 생계를 돕는 것을 보고 허락했다고 합니다. 1922년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면서 해강 김규진의 문하에 입문하게 되면서 글씨와 그림을 배우고 '죽사(竹史)'라는 호를 받게 됩니다. 이때 '청죽'이라는 작품으로 입선하면서 주목을 받게 되면서 우리나라 전통의 서예적 기법을 기초로 하는 시기였습니다.

홍성이응노의집에서예술의큰줄기를만나다 4▲소년시절 서예적 기법을 배우던 시기


제2전시실 '대나무를 버려야 대나무를 얻는다'에서는 전통 방식의 그림만을 그리던 이응노에게 바람에 흔들리던 대나무밭의 모습은 무척 생경했고, 생동감 있게 다가왔으며, 청년이었던 이응노의 작품에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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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전시실 '서양의 화풍을 수용하여 전통 회화를 새롭게 만들다'에서는 일본 화단의 진출을 꿈꾸면서 중국과 일본 화가들의 화집을 구해 연구하던 중 1936년 가을 일본 유학을 떠나 동양화와 서양화의 장점을 두루 공부하게 됩니다. 서양화를 공부하면서 자연 물체의 사실주의적 탐구를 하게 됩니다. 먹을 사용하는 것은 동양화에 가까웠지만 섬세하게 그려내는 서양화의 기법이 곁들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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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일본이 패전한 후 귀국해 예산 수덕사 수덕여관을 사들여 화실로 꾸미고 여관에서 생계를 이어가다가 고향 홍성에서 해방을 맞았습니다. 바로 서울로 올라가 남산 밑에 화실을 마련하였고, 1948년부터 홍익대학 미술학부 주임교수로 동양화를 지도하게 됩니다. 당시 반추상적 표현이라 할 수 있는 자연 사실에 대한 사의적 표현의 작품들을 그려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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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전시실 '동양과 서양의 문화 예술을 융합하여 독창적 예술세계를 창출하다'에서는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났고, 아들이 북한에 끌려가면서 이응노 화백은 동백림 사건에 휘말리게 됩니다. 그해 홍성 생가 근처로 피난을 와서도 쉬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하면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1953년 휴전이 된 후 서울로 올라와 프랑스로 떠나기 전 도불전을 열며 활발한 활동하던 중 1959년 독일대사 리하르트 헤르츠의 주선으로 독일 순회 개인전 및 부부전을 열기도 합니다. 이때부터 1969년까지 10년 동안 자연 사실에 대한 사의적 추상 표현이 나오게 됩니다. 환경의 변화가 창작의 태도를 바꾸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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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과 파리를 오가며 활동하던 중 1967년 64세의 나이에 동백림(동베를린)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을 받고 서대문구치소와 대전교도소, 안양교도소를 거치면서 1년 8개월의 수감생활을 하였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납북했던 아들을 만날 수 있다고 해서 동베를린을 방문했던 게 빌미가 되었다고 합니다. 1969년 형집행정지로 가석방이 된 후 서울과 예산에서 요양을 한 후 그해 5월에 다시 파리로 출국하게 됩니다. 수감생활 중에도 도시락통, 부채, 밥풀, 간장 등 모든 재료를 사용해 회화, 조각, 판화 등 '옥중작' 300여 점을 만들었을 만큼 열정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홍성이응노의집에서예술의큰줄기를만나다 9


파리로 출국 후 10년 기간 동안 만든 작품에는 서예적 추상이라 이름이 붙게 됩니다. 감정 표현이나 발상은 다분히 서양적이지만 그림은 훨씬 부드럽고 절제된 동양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면서 그에게 민중운동은 감동을 주었고, 79세의 노화가에게 '군상'이라는 작품을 연작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해 주었습니다. 

홍성이응노의집에서예술의큰줄기를만나다 10


이후에도 계속 국내에 들어오지 못하고 파리에 머물면서 1983년 80세의 나이에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게 됩니다. 그리고 1989년 그의 나이 86세에 드디어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12년 만에 개인전을 열게 되었지만,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별세하게 됩니다. 그의 묘지는 유명 예술인들이 잠들어 있는 파리 시립 페르 라세즈에 안장되었습니다.

홍성이응노의집에서예술의큰줄기를만나다 11▲한국사, 미술사, 고암 이응노의 삶을 비교해 볼 수 있는 연보


당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고, 한국과 일본, 파리, 독일 등을 오가면서 그의 화풍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한국의 전통 소재와 동양화 기법은 고집스럽게 지키고 있었습니다. 추석 연휴 고향으로 가는 길에 이응노 화백을 만나 동양적 감수성에 취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응노의 집
충남 홍성군 홍북읍 이응노로 61-7(041-630-9232)

관람시간
하절기(3월 ~ 10월) 09:00~18:00(입장마감 17:30)
동절기(11월 ~ 2월) 09:00~17:00(입장마감 16:30)

휴관일 매주 월요일(월요일 공휴일인 경우 화요일 휴관)
1월 1일, 설날, 추석 당일에는 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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