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나를 스치며 지나간 모든 사람이 나의 스승이었기 때문"
▲ 건설현장의 여장부 서른아홉 해를 산 최은지 씨의 짧은 인생 긴 이야기
프롤로그
예닐곱 살이 되기 전부터도그녀는 동네 모퉁이를 돌아 칡을 캐러 다녔다. 그곳에서 운 좋으면 뱀도 그녀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처음 본 칡꽃은 유난히 반짝이는 보라색이었다. 커서 칡꽃처럼 반짝이는 인생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가난과 함께 아버지의 폭력, 부모님의 갈등, 혼자라는 외로움, 희망이 배제된 하루살이 인생을 살면서 어린 나이에 세 번의 자살 시도를 했다.
지난 26일 서른아홉 해를 건너는 최은지 씨가 파주에서 서산으로 내려온단 소식을 듣고 점심을 함께했다. 긴 머리를 묶은 그녀의 모습은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여자의 몸으로 건설현장에 뛰어들어 험한 일을 한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던 은지 씨는 차가운 주스를 한 모금 길게 마시더니 입을 뗐다.
“애들 아빠는 좋은 사람이에요. 하지만 제겐 버거운 남자였죠. 간단히 설명하면 함께 했어도 미혼모 같은 느낌일까요. 하지만 이젠 감사해요.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게 성장시켜준 것이 바로 애들 아빠거든요. ‘아빠, 당신의 삶을 응원해. 행복했음 좋겠어’라고 애들아빠에게 진심으로 말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녀는 또 이렇게 말했다. “스스로 홀로서기를 하고 싶어요. 멋진 엄마로 아이들 곁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거든요. 제가 힘든 시절을 겪어봐서인지 우리 아들들에게만큼은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요.”
아이들을 보면 가슴이 맑아진다는 은지씨
Q 어린 시절이 상당히 불우했다. 당시 얘기들을 들려달라.
서산시 운산면에서 목수였던 아버지 사이에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막내라곤 하지만 오빠와는 10살, 언니와는 8살 차이로 태어나서인지 내겐 형제라기보단 어쩌면 부모님 같은 존재들인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언니는 나를 업어서 키웠고, 그것도 모자라 학교에 데리고 다니며 수업을 받을 정도였다.
우리는 서로를 챙기며 의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슴푸레 저녁이 오면 그때부터 우리는 가슴을 조려야 했다. 지나친 가부장적 성향에 알코올중독까지 있던 아버지의 가정폭력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엄마를 때리는 아버지를 보며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내가 너무 싫어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많이 우울했다.
집 앞 밤나무에 밤송이가 떨어지는 어느 날이었다. 새벽녘 부모님의 싸우는 소리를 듣고 깨어났다. 엄마가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발견하고 7살 어린 마음에도 이대로 나가면 영영 돌아올 것 같지 않단 생각이 퍼뜩 들었다. 벌떡 일어나 엄마를 눈으로 쫓으며 달려나갔다. 급하게 나오느라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내 작은 발에는 수북이 떨어진 날카로운 밤송이 가시들이 박혀 들어가고 있었다. 밤송이는 어쩌면 내 작은 심장까지도 파고들었던 것 같다.
이리저리 엄마를 찾아다녔다.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찾다 어두컴컴한 밤나무 아래 울고 있는 엄마를 발견했다. 달려가 엄마를 안았다. 엄마 냄새가 그렇게 달았던 적이 없었다.
내 발을 본 엄마는 깜짝 놀라며 깊게 박힌 가시를 하나하나 뽑아주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서야 엄마가 떠나지 않고 내 곁에 있을 거란 안도감이 들었다. 그리고 내 눈에서는 닭똥 같은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가시를 뽑아내는 통증이 얼마나 크던지.
한결로타리 민인애 회장이 롤 모델이라고 말하는 은지씨
Q 살아가면서 정말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있다면?
중학생 때였다. 아버지가 큰 돌을 엄마 머리 위로 던졌다. 만화 속에서 분수처럼 피가 터져 나오던 장면과 똑 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 날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엄마가 잘못되는 줄 알고 미칠 듯이 심장이 뛰었다. 내가 남자였다면, 내가 조금만 더 컸더라면 우리 아버지를 가만히 두질 않았을 것이다.
목수일을 하신 아버지는 월급날만 되면 행방불명이었다. 어떤 날은 얼큰하게 취한 아버지가 길거리에 돈을 뿌리며 “주워가라”고 소리를 치곤 했다. 내 어린 기억을 더듬어 보면 엄마는 항상 울고 있었고, 아버지는 늘 화가 난 사람처럼 무서운 얼굴이었다. 이런 우리 집 환경이 너무 싫었다. 항상 떠나고 싶었다. 누구에게 내 마음을 드러낼 수도 없었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내 존재를 부정하기 시작했다. 살고 싶지 않았다. 엄마의 인생을 보며 앞으로의 내 삶이 오버랩되기도 했다. 세상을 살아가기엔 내가 너무 버거웠다.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빠는 집을 멀리했고, 학교 졸업 후에는 바로 입대를 해버렸다. 언니는 그런 아빠가 싫다고 서울 여의도 야간고등학교로 떠났다. 살림에 보탬이 되어야 했던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래도 피는 물보다 더 진한지 술 취해 길거리 어느 틈에 쓰러진 아버지를 모른척하며 지나친 것이 지금까지 가슴 언저리에 뻐근히 맺혀있다. 친한 친구들이 이런 아버지를 보며 흉을 보는데도 나는 왜 “우리 아빠야”라며 말 한마디 못했을까.
참 희한하다. 예전에는 그렇게 밉던 아버지가 이젠 약해진 모습으로 계신다. 함께 할 시간이 짧다고 생각하면 눈물부터 난다. ‘내가 왜 태어났을까’를 생각했던 내가 지금은 부모님이 계셨기에 우리 아들 태우와 준수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저 감사하다.
▲ 항상 긍정적인 마인드로 자신을 다독이는 은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