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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칼럼

이순신의 극적인 승리, 명량해전

충무공 이순신 이야기

2022.06.15(수) 16:52:34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scottju@korea.kr
               	scottju@korea.kr)

명량해전 상황도

▲ 명량해전 상황도



일본함대 밀물타고 명량 진입
썰물로 바뀌고 강한 북풍으로
日후퇴 조선수군 극적 승리

1597년 8월 3일 경상도 진주에서 통제사 재임명교서를 받은 이순신은 바로 전라도로 이동하여 순천-보성-장흥-해남을 거치면서 수군을 수습, 정비한 후 8월 29일 진도 벽파진에 주둔하였다. 13척의 판옥선을 확보한 이순신은 9월 7일 침입해 온 일본함대 13척을 물리친 후 점차 서진해 오는 일본군을 막을 방책을 강구하였다. 그러던 중 9월 14일 일본함대 선봉 55척이 벽파진 건너편 어란 앞 바다까지 도착하였고 후속함대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순신은 9월 15일 진을 우수영으로 옮겼다. 좁고 조류가 빠른 명량이라는 천험의 요새지 특성을 잘 활용하면 승산이 있다는 점을 감안한 것이다. 이순신은 10배가 넘는 적을 맞이하여 휘하 장수들에게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살고, 살기만 도모하면 죽는다’며 결사항전의지를 강조하였다. 

9월 16일 아침 일본함대 130여 척이 밀물을 타고 명량수로로 진입해 왔다. 이순신은 휘하 13척의 전선 중 12척은 수로를 가로질러 일자진(一字陣)을 형성하도록 하고 자신의 배는 최선봉에서 일본 함대와 접전을 벌였다. 그리고 참전 의사를 밝힌 피란선 100여 척을 멀리 후방에 포진시켜 성원토록 하였다. 

전투 초기에 휘하 전선들은 두려움에 뒤로 물러난 가운데 이순신 대장선만 선봉에서 교전하다가 점차 휘하 전선들도 합류하여 사력을 다해 싸웠다. 화포로 적선을 격침시키는 한편 적의 등선을 막기 위해 근접전도 치열하게 벌였다.

이후 13시경에는 조류가 썰물로 바뀜으로써 조선 수군은 닻을 내려서 전선을 고정시킨 후 계속 대포를 쏘아 적선을 격침시켰다. 15시가 넘어서는 조류가 최강류로 흐르고 북풍도 강하게 불어와 바람을 이용한 화공전을 펼쳤다. 당하지 못한 일본 군선들이 조류를 따라 수로 입구로 완전히 물러나면서 해전은 종료되었다.

해전 결과 일본의 전선 31척이 완전히 분멸되었으며, 다수의 전선이 파괴된 채 일본함대는 남해상으로 후퇴하였다. 이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전선은 1척도 분멸되지 않았다. 다만 근접전을 수행함으로써 수군과 의병 중 다소의 인명 피해는 발생하였다. 

이 해전은 그야말로 극적인 승리였다. 이순신은 이날 일기에 하늘이 도왔다[天幸天幸]고 기록하였다. 명량해전 승리는 일본군의 승승장구하던 기세를 일시적으로 꺾음으로써 서해를 통한 일본군의 북상을 막아 조명 연합군의 대일본군 방어에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제장명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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