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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추사의 흔적을 따라 걸으며 생각하며

2022.03.01(화) 11:10:17 | 설산 (이메일주소:ds3keb@naver.com
               	ds3keb@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추사고택으로 가는 길에서

누가 내게 세상을 먼저 살다간 사람 중에 그 사람처럼 다시 살아보고 싶은 사람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추사 김정희를 떠올릴 것 같다.
그의 천재성, 타고난 재능 그리고 집념과 노력, 고독과 성취 이런 것들을 본받고 싶기 때문이다.
오래전에 가본 추사 고택은 고택이 갖고 있는 이야기에 비해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것 같은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예당평야에 길게 쭉 뻗은 도로를 달리면서 병자와 임진 두 난리에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이 풍요롭고 기름진 땅에서 윤택하고 평온하게 살았을 가야산 앞뒤 열 개 마을.
내포의 조상 중에는 최영, 성삼문, 이순신, 김정희, 최익현, 김대건, 윤봉길, 김좌진, 김옥균, 심훈, 박헌영, 한용운, 이응로 같은 한마디로 ‘기’가 센 사람들로 부러질지언정 절대로 굽히지 않을 ‘쉽지 않은’ 조상을 배출할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생각을 해보는데 유홍준 교수는 내포 땅의 논두렁 정기가 아니라 가야산 정기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부지런한 농사꾼들이 긴 쉼을 부여했던 밭에 퇴비를 뿌리며 농사 준비를 하고 버스를 기다리는 어르신들이 모여있는 정류장 뒤에 있는 추사의 고조부 김흥경 묘소 앞에 껍질이 하얀 소나무 한 그루 서 있다.
이 백송은 1809년 추사 김정희의 나이 25세 때 청나라 연경에 다녀오면서 가지고 온 씨앗을 심었다고 하니 200년 이상 이 자리에 있었던 모양이다.
껍질이 하얀 이 소나무는 우리나라에서는 번식이 어려워 몇 그루밖에 없다고 한다.
비록 가지 두 개가 죽고 한 개만 남았지만, 일반적이지 않은 것에서 느껴지는 기품과 고고함이 있다.

예산 용궁리 백송
▲ 예산 용궁리 백송


자목련이 작은 꽃망울을 맺은 추사고택을 거닐며

2008년에 추사기념관이 건립되고 추사고택 주변을 정리했다고 하더니 화순옹주 홍문에서부터 김정희 묘소 주변에 이르기까지 낮은 구릉에 펼쳐진 너른 잔디밭이 조성되어 말끔하고 편안해 보인다.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아직은 깨어날 때가 아니라는 듯 커다란 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들이 늘어뜨리고 있는 추사고택은 추사의 증조부인 김한신이 영조의 사위가 되면서 하사받은 저택으로, 이 땅에 하늘이 내린 거장 추사 김정희가 지금으로부터 236년 전인 1786년(정조 10년)에 아버지 김노경과 어머니 기계 유씨의 장남으로 태어난 곳이다.

추사고택 담장과 솟을대문▲ 추사고택 담장과 솟을대문

솟을대문 안 추사고택
▲ 솟을대문 안 추사고택

문간채가 있는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ㄱ자 사랑채가 있고 그 기둥마다 걸린 60여 개나 된다는 예의, 흰 바탕에 밝은 남색 음각 글씨가 새겨져 있는 주련이 고택의 품위를 더해 주고 이 집 마당의 오래된 살구나무와 매화에 꽃이 피려면 아직은 조금 이른, 이 겨울이 다 지나가기 전에 찾아온 나그네는 추사고택 사랑채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을 나직이 소리 내어 읽어본다.

書勢如孤宋一枝(서세여고송일지) 글씨 쓰는 법은 외로운 소나무 한 가지와 같다.
世間兩件事耕讀(세간양건사경독) 세상에서 두 가지 큰일은 밭 갈고 책을 읽는 일이다.

추사고택 사랑채
▲ 추사고택 사랑채

추사고택 주련
▲ 추사고택 주련

추사고택 ‘죽로지실’
▲ 추사고택 ‘죽로지실’

사랑채 거실 위 ‘세한도’ 모사본
▲ 사랑채 거실 위 ‘세한도’ 모사본

추사가 직접 쓴 글씨를 새겼다는 해시계 ‘石年’(석년) 정중앙 뒤로 그림자가 늘어진 것을 보니 시간은 정오를 지나고 있는 것 같고 사랑채 앞마당 자목련에는 겨우내 조금씩 몸집을 키워왔을 꽃망울이 많이도 달려 다가올 봄날 풍성함을 예고하는 듯하다.

해시계 ‘석년’ ▲ 해시계 ‘석년’

사랑채 앞마당 자목련
▲ 사랑채 앞마당 자목련

사랑채 뒤 안채는 ㅁ자형 구조로 6칸 대청을 중앙에 두고 안방과 건넌방을 마주하고 마당을 가로질러 중문을 내었다.
사방이 막혀있어 다소 답답한 느낌이 들었으나 조선 사대부 집들의 안채는 부녀자들 생활공간인 만큼 밖에서 들여다보이지 않게 이렇게 지었던 모양이다. 
 추사고택 안채
▲ 추사고택 안채

안채 뒤로는 고택에서 제일 높은 곳에 별도로 돌담이 둘러쳐진 영실에 추사 영정이 모셔져 있다.
영정으로 보는 추사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 그리고 다문 입이 예사롭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이 넉넉히 짐작된다.
이 영실 뒤로는 추사 선생을 닮은 것 같은 단단해 보이는 오죽이 이 겨울에도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다.

추사고택 영실
▲ 추사고택 영실

추사영실의 추사 영정과 현판
▲ 추사영실의 추사 영정과 현판

영실 뒤 오죽
▲ 영실 뒤 오죽


추사의 흔적을 따라 화암사를 가다

추사 고택 뒤 야트막한 산길은 내포문화숲길이 조성되어 있다.
이 숲길을 따라가다 보면 추사 선생의 흔적을 만날 수 있어 ‘용산’이라 부르는 산의 숲길을 따라 걷기 시작한다.
숲길 위에는 지난가을 떨어진 갈참나무 잎이 수북하고 내포문화숲길 표지기 리본이 부는 바람을 따라 펄럭일 뿐 고요하고 적막하다.
가끔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라는 듯 보이는 나무 의자에 앉아 보기도 하고 걷다 보니 나무들 사이로 작은 절집 화암사가 나타났다.

추사고택 산책길
▲ 추사고택 산책길

화암사 가는 숲길
▲ 화암사 가는 숲길

화암사
▲ 화암사

화암사는 추사의 증조부 김한신이 임금으로부터 별사전으로 받은 토지 안에 지어진 가문의 안녕과 복을 비는 절로, 아마도 추사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을 따라 자연스럽게 이곳을 드나들었던 모양이다.
이 절집의 요사채는 추사 고택의 형태와 비슷하고 주련도 걸려 있다.

화암사 요사채
▲ 화암사 요사채

사찰 뒤에 있는 병풍바위 암벽에는 추사의 암각문이 새겨져 있다.
안내문에 의하면 좋은 경치를 뜻한다는 ‘詩境’(시경)이라고 새긴 글씨는 스승인 옹방강으로부터 받은 탁본이라고 하는데 두꺼운 예서체 글씨가 바위에 박혀있으니 무겁게 다가오고 바로 옆에는 행서체로 '천축고선생댁' 이라고 새겨놓았고 이곳에서 좀 더 떨어진 곳에 있는 ‘쉰질바위’라 부르는 암벽에 ‘小蓬萊’(소봉래)라고 새긴 암각문을 보면서 잠시 눈을 감고 그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바위에 붙어 망치로 징을 두드려가면서 글씨를 새겼을 모습을 상상해 본다.  

추사 암각문 ‘詩境’
▲ 추사 암각문 ‘詩境’


아름다운 사람들 화순옹주와 김한신

숲길을 따라 다시 돌아온 추사고택 영역 오른편에는 화순옹주 홍문과 화순옹주와 김한신이 함께 묻힌 묘소가 있다.
기록에 의하면 영조의 둘째 딸이자 김정희의 증조모인 화순옹주는 13세 때 영의정을 지낸 김흥경의 아들인 김한신과 혼인하였으며 김한신은 인물이 잘생기고 총명하여 영조의 사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평소에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지 않고 항상 몸을 낮추어 생활할 만큼 겸손했다고 한다.

김한신과 화순옹주가 함께 묻힌 묘소
▲ 김한신과 화순옹주가 함께 묻힌 묘소

이런 김한신이 3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화순옹주는 14일을 굶어 남편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고 이에 영조는 옹주가 아버지의 말을 따르지 않고 죽었으니 불효라 하며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으나, 후에 정조가 열녀문을 내렸으며 화순옹주는 조선 왕실에서 나온 유일한 열녀라고 한다.

화순옹주 홍문
▲ 화순옹주 홍문

이들의 지고지순하고 아름다웠던 사랑과 삶을 화순옹주 졸기에서 엿볼 수 있어 인용해 보면

“심히 부도(婦道)를 가졌고 정숙하고 유순함을 겸비하였다.
평소에 검약을 숭상하여 복식에 화려하고 사치함을 쓰지 않았으며,
도위(都尉, 김한신)와 더불어 서로 경계하고 힘써서
항상 깨끗하고 삼감으로써 몸을 가지니, 사람들이 이르기를,
‘어진 도위와 착한 옹주가 아름다움을 짝할 만하다.’고 하였는데
도위가 졸하자, 옹주가 따라서 죽기를 결심하고,
한 모금의 물도 입에 넣지 아니하였다.”

이분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에 내 발걸음은 서성거려지고 묘역 잔디밭 밖 붉은 솔잎이 덮여 있는 곳에는 마른 솔잎 사이로 수선화 초록 잎사귀가 조금씩 고개를 내밀고 있다.
아마도 머지않은 봄날 이곳에는 노란 수선화로 덮일 것 같다.


추사 묘소에서 푸른 소나무들을 보며

조각공원과 백송공원을 거쳐 추사 김정희가 잠들어 있는 묘소로 왔다.
5년 전 제주 올레길을 걸으면서 둘러본, 바람 많고 땅이 거친 제주에서도 가장 사람이 살기 힘든 땅이라고 하여 일명 ‘못살포’라고 불렀다는 모슬포 대정현의, 몇 걸음 안 걸으면 이쪽 끝에서 저쪽 끝이 닿을 듯이 좁고 척박한 곳에 탱자나무로 집 둘레를 쳐놓은 유배지와 추사관에 전시되어 있던 그의 흉상에서 느껴졌던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칠십 평생에 나는 벼루 열 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라고 일갈하며 추사체를 완성하였고 세한도를 그려낸 거장이 이곳에 영면해 있는 묘소 앞에 서니 고개가 절로 숙어진다.

추사 김정희 묘소에서 본 추사고택
▲ 추사 김정희 묘소에서 본 추사고택


추사 김정희 묘소
▲ 추사 김정희 묘소

묘소 주변에 서 있는 한겨울 잎 푸른 소나무를 보니 세한도 발문 ‘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이 생각난다.
‘날이 추워진 뒤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추사 김정희 묘소와 소나무
▲ 추사 김정희 묘소와 소나무

추사에 대해 좀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아 기대했던 추사기념관은 아쉽게도 코로나 사태로 휴관 중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아쉬운 것은 추사기념관도 그렇고 기념관 앞에 있던 동상도 일반화되어있는 틀에 고정되어 이 거장이 가지고 있는 특별함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어 별다른 감흥이 없다.
세한도에 그려져 있는 ‘감자창고’라고 불리는 제주의 추사관과 그곳에 있는 눈높이에 맞춘 동상은 주제를 갖고 만들었다는 것을 한눈에도 알 수 있게 특별하고 친근했었다.
동상의 색은 꼭 붉은색을 띤 황금색이어야 한다는 법칙이라도 있는 듯 제주 추사관에 있던 그것과도 비교된다.
그러더라도 추사 김정희가 이곳에서 태어났고 머물렀다는 사실만으로도, 머지않아 이 집 마당의 살구나무와 자목련에 꽃이 피어나고 나무에 물이 올라 연초록 새잎이 돋아나고 이 묘소의 누런 잔디밭에도 새싹이 돋아나는 화사한 봄날이 오면 지금보다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궁금할 한 나는 이곳으로 오는 길 위로 차를 달릴 것 같다.

추사고택
- 주소 : 충남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로 261
- 전화번호 : 041-339-8242

추사기념관
- 주소 :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로 249
- 전화번호 : 041-339-8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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