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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돈암서원 응도당 마루에 앉아

2022.01.17(월) 11:28:57 | 설산 (이메일주소:ds3keb@naver.com
               	ds3keb@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돈암서원응도당마루에앉아 1

논산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우리나라의 아홉 개 서원 중 한자리를 차지한 돈암서원이 있는 교육과 예를 중시한 유서 깊은 도시이다.
오래전 안동 병산서원 만대루 서서 병산 밑을 흐르던 검은 실루엣의 낙동강을 잊지 못하는 나는 논산에 왔으니 서슬 푸른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이후에도 남아 보존된 47개의 서원 중 하나요 세계유산인 돈암서원으로 간다.
서원으로 가는 길 우측에 모든 것이 사라진 이 겨울에도 성성한 대숲이 나그네를 반기고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유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자랑스럽게 서 있다.
돈암서원 입구 대숲
▲ 돈암서원 입구 대숲

세계유산임을 알리는 표지석
▲ 세계유산임을 알리는 표지석

우리나라의 서원은 과연 어떤 가치가 있길래 세계유산으로 인정받은 것일까 싶어 관련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한국의 서원은 조선 후기 교육 및 사회적 활동으로 널리 보편화 되었던 성리학의 증거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았고, 각각의 서원마다 세계유산으로서의 진정성과 완전성, 보존관리계획 등도 충분한 요건을 갖추었다고 평가받아 세계유산이 되었다고 한다.
 서원은 조선 사회에 성리학이 정착하면서 사림 세력이 지방에 설립한 사립 고등교육기관으로 서원의 공간 배치는 성리학을 연구하며 인재를 교육하는 강당이 있는 강학 공간, 존경하는 스승의 위패를 모시고 재향을 올리는 사당이 있는 제향 공간, 그리고 유생들이 유식을 위한 유식 공관으로 구성되었고 주변의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며 인격을 갈고닦는 인성교육에 중심을 두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 서원 중에서 소수서원, 남계서원, 옥산서원, 도산서원, 필암서원, 도동서원, 병산서원, 무성서원, 돈암서원이 2019년 7월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한국의 서원’이란 이름으로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되었으며 이 서원들은 사우와 함께 조선 후기 1,000여 개에 달했다는 한국 서원의 총체적인 특성을 보여 준다고 한다.
세계유산에 등재된 서원들을 다 가보지 못해 잘 모르긴 해도 병산서원에서 본 것처럼 성리학자들은 지형과 자연경관을 잘 이용하여 서원을 건축하였음이 분명할 것 같아 아름다운 풍경을 품고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본다.
돈암서원은 1634년 지역 유생들이 사계 김장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으며, 원래는 현재의 위치와 가까운 하임리 숲말 연산천 가까이 있었는데 19세기 후반에 홍수를 입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하마비와 홍살문을 지나 서원의 영역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담 밖에 홀로 당당하게 서 있는 2층으로 된 전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의 산앙루이다.
성리학자들은 산과 물이 가까운 곳에 서원을 지었다고 하니 병산서원의 만대루처럼 원래 있던 하임리 돈암서원 산앙루 앞으로 연산천이 흘렀을 것 같고, 유생들은 누각에 올라 시를 짓기도 하고 휴식을 취하기도 하였을 것 같다.

돈암서원 산앙루
▲ 돈암서원 산앙루

돈암서원응도당마루에앉아 2

서원 정문인 솟을대문으로 된 입덕문을 들어서니 정면으로 김장생이 강학을 하던 곳이라는 양성당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유생들의 기숙사였던 거경재와 정의재가 나란히 서 있고 경회당 앞 담벼락 가까이에는 해마다 묵은 껍질을 벗어내고 새로운 줄기로 갈아입는 배롱나무와 같이 학문을 정진하라는 뜻으로 서원이나 사당에 많이 심었다는 굵고 가지를 많이 뻗은 잘생긴 배롱나무가 긴 겨울의 휴식을 부여받고 서 있다.

입덕문 안으로 보이는 양성당
▲ 입덕문 안으로 보이는 양성당

양성당(가운데), 정의재(좌), 거경재(우)
▲ 양성당(가운데), 정의재(좌), 거경재(우)

양성당과 연산현돈암서원비기
▲ 양성당과 연산현돈암서원비기

경회당과 배롱나무
▲ 경회당과 배롱나무

경회당 앞 배롱나무
▲ 경회당 앞 배롱나무

돈암서원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건물은 아무래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 강학 공간으로 사용되었던, 보물 제1569호로 지정된 응도당으로 우리나라 서원의 강당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며 맞배지붕 지붕 형태의 양쪽 측면에는 ‘눈썹지붕’이라 부르는 덧지붕 일종인 영을 두어 비가 벽으로 들이치지 않게 하였다고 한다.
비록 당초 위치에서 이전되기는 하였지만 17세기 조선의 선비들이 이상적인 고대 예제를 따라 건물을 조성하려고 했던 노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사례라고 한다.
응도당
▲ 응도당

거경재 마루 아래 나란히 놓인 흰 고무신을 보니 근래 읽은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0』에서 「반중잡영」을 해설해 놓은 성균관 유생들의 기숙사였던 동재와 서재에서의 일상을 담은 글이 생각난다. 이 작은 건물에는 숙식을 함께 하면서 동문수학했을 유생들의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을까.

거경재 마루 아래 놓인 흰 고무신
▲ 거경재 마루 아래 놓인 흰 고무신

거경재
▲ 거경재

정회당
▲ 정회당

전사청
▲ 전사청

꽃담에 둘린 문이 굳게 닫힌 숭례사에는 김장생을 비롯해 그의 아들이자 제자인 김집과 송시열, 송준길 네 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꽃담에는 김장생의 예학정신이 담겨 서원의 원훈과도 같았을 “땅이 세상을 짊어지고 바다가 만천을 수용하듯 학문을 익혀 예를 실천하고 따사로운 인성을 함양하라”라는 뜻의 지부해함(地負海涵), 박문약례(博文約禮), 서일화풍(瑞日和風)이 새겨져 있다.
[이상 참조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 포털, 논산시청 홈페이지, 돈암서원 안내판]

숭례사 정문과 꽃담
▲ 숭례사 정문과 꽃담

숭례사
▲ 숭례사

그렇게 한 바퀴 둘러보고 다시 응도당으로 내려와 너른 마루에 올라보았다. 응도당 내부에는 우암 송시열이 썼다는 힘이 느껴지는 글씨체의 서원 현판이 달려있고 내부 서까래와 기둥과 창살에는 이 건물의 연륜을 말해주듯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나는 응도당의 따뜻한 볕이 들어오는 창가에 앉아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지나고 저 배롱나무에 연분홍 꽃이 피거들랑 다시 와서 바람이 들려주는 그 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리라 다짐해 본다.

돈암서원 현판
▲ 돈암서원 현판

응도당 마루에 앉으면 눈에 들어오는 풍경
▲ 응도당 마루에 앉으면 눈에 들어오는 풍경


- 돈암서원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3길26-14
- 전화 : 041-733-9978
- 입장료 :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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