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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왕대사 이야기

2021.12.16(목) 23:01:47 | 가람과 뫼 (이메일주소:caption563@naver.com
               	caption563@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보령시 내항동에 자리한 왕대사는 서해 바다를 향하여 달리던 차령산맥의 끝자락인
왕대산 9부 능선에 아스라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해발 124m 의 나즈막한 산이지만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것이 사뭇 강건하고 웅장하여
보는이로 하여금 경탄을 자아나게 한다.
절의 초입에 이르면 마치 성을 쌓아 놓은듯한 모습이 주변을 압도하고
멀리 내려다 보이는 풍광은 탁 트인것이 가슴을 툭 터지게 하는 시원함이 있다. 
오랜 역사와는 달리 현존하는 것은 대웅전과 요사채 그리고 마애불이 험난 하였던 지난 세월을
이야기 하는듯 하여 가슴 한켠을 아프게 한다.

왕대사이야기 1

왕대사이야기 2

왕대사이야기 3

왕대사이야기 4

전설에 의하면 신라의 마지막 왕 이었던 56대 왕 김(金) 부(傅)가
후백제 견훤의 핍박으로 나라를 더이상 지탱하기 어려워지자 중신회의를 거쳐 고려에게 귀부를
논의 하였다 한다.

당시 태자는 이에 반대하여
"나라의 존속과 멸망은 반드시 하늘의 운명에 달려 있으니 다만 충신 의사들과 함께 민심을 합하여
스스로 굳건히 힘을 다한뒤에 망할지언정 어찌 1천년의 사직을 하루 아침에 가벼이 남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 하며 울분을 토하였으나
김(金) 부(傅)는 "고립되고 위태로움이 이와 같아서 나라를 보장할 수 없다" 라며
포악한 견훤으로부터 백성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한다 하며 935년 고려 태조인 왕건에게
항복을 한 후 잠시 이곳에 머물렀는데 왕이 머물렀던 곳이라 하여 이산의 이름을 왕대산 이라 하였고
절의 이름도 왕대사라 하였다 한다. 

왕대사이야기 5

고려에 항복한 김(金) 부(傅)는 고려 태조 왕건의 맏딸인 낙랑공주와 혼인을 하였고
왕건으로 부터 낙랑왕에 봉해졌으며 태조는 신라를 경주로 개칭하고 식읍으로 주었으며
김(金) 부(傅)를 금성의 사심관으로 임명 하였다.
이에 태자는 망국의 설움을 안고 개골산에 들어가 초근목피로 생활하며 죽을때까지 산에서
나오지를 않았다 한다. 
이에 후대 사람들이 마(麻)로 된 옷을 입고 살았다 하여 마의 태자라 하였다 한다.

978년 김(金) 부(傅)가 죽자 '경순' 이라는 시호가 고려 조정으로 부터 내려져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 이라 하였다.
경순왕의 능은 사적 제 244호로 지정되었으며 경기도 연천에 소재하고 있는데
역대 신라 왕 중 유일하게 경주가 아닌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마애불
▲ 마애불

왕대사이야기 6

왕대사의 서쪽 절벽에 음각으로 조성되어 있는 마애석불은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 317호로
지정되어 있다.
천여년의 시간속에 풍화 작용으로 인하여 이제는 옛모습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희미하여진 모습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56억 7천만년이 지난 미래에 출현하시여
중생을 구제하신다는 미륵 부처님에 대한 희망은 아직도 모두의 가슴에 남아
온기를 불어 넣어 주는듯 싶다.

왕대사이야기 7

대천항 등대
▲ 대천항 등대

왕대사이야기 8

왕대사이야기 9
 
왕대사를 거쳐 어항에 들려 둘러보다 보니 쌀쌀한 날씨탓인지 오가는 이들의 걸음이 바쁘다.
모처럼 나선길에 탁트인 바다를 보고자 대천해수욕장으로 향하였다.
철지난 바닷가에는 한적함이 가득하지만 바다에 부숴지는 눈부신 햇살이 장관이다.
한가로이 그네를 타는 사람들의 모습이 참 아름답다.............

왕대사이야기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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