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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가슴 아픈 역사, 공주 우금치의 '한'을 보듬다

2021.03.28(일) 17:43:51 | 이영희 (이메일주소:dkfmqktlek@hanmail.net
               	dkfmqktlek@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동학농민전쟁, 동학농민군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공주 우금치다.
그 동학농민군이 최초 결성후 '호남창의대장소'를 조직하여 농민군을 정비한 시점이 3월 25일이었다.
 
그리고 백산에서 대오를 편성한 농민군은 4월 7일 황토현에서 전주 감영군을 격파한 후, 정부군과 정면대결을 피하고 힘을 모으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가 정읍 흥덕 고창 무장 장성 등지를 공략한 시점도 4월7일.
딱 이 시기가 그때의 동학군 움직직임과 맞는 시점이다.
 
동학에 기반을 둔 반제 반봉건 근대화운동이 바로 동학농민운동이다. 평가에 따라 그 이름도 다양하게 불리우는데 동학혁명, 동학난, 동학혁명운동, 동학농민전쟁, 갑오농민전쟁 등 다양하게 부른다.

이 동학운동은 1894년 1월에 봉건적 수취체제의 모순에 대항한 고부 농민 봉기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전봉준은 무장에서 손화중 김개남과 함께 4000여 명의 농민군을 조직하고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안민을 위해 일어서자는 내용의 창의문을 발표했다.
그렇게 시작해 불꽃처럼 일어섰지만 체계화되지 못한 농민군의 조직적 한계, 그리고 일본과 손잡은 조정 관군의 압도적인 화력을 이기지 못하고 모두 다 꽃처럼 쓰러져 갔다.
   동학군이 1894년 봄, 들불처럼 일어섰던 그때를 기억하며 공주 우금치 고개를 올라 봤다.

우금치에는 동학혁명군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공주 우금치의 동학혁명군 위령탑

▲ 공주 우금치의 동학혁명군 위령탑


그때의 역사와 아픔을 기억하는지...

▲ 이 탑은 그때의 역사와 아픔을 기억하는지...


우금치 위령탑 왼쪽에 서서...

▲ 우금치 위령탑 왼쪽에 서서...


동학농민전쟁에서 가장 뼈아픈 부분은 우리 백성들이 서로 뜻이 안맞아, 동학군이 결국 조정에 반기를 든 것이니 내란이나 역모에 준하는 행동일지라 해도 그 백성들 모두 우리 핏줄인데 그들을 살상한 사람들이 일본군이었다는 사실이다.
힘없는 조정이라 해도 일본의 힘을 빌려 마지막 전투지였던 이곳 우금치에서 사실상 학살에 가까운 전투를 치렀다는 점이 역사적으로 두고두고 가슴아프고 뼈에 사무치는 일이 아닐수 없다.
 
세월이 흘러 박정희 육군소장이 일으킨 5.16정변. 그는 군사정변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동학혁명군 위령탑에 “5.16군사혁명이 동학농민전쟁의 뜻을 이어받았노라”고 탑문을 썼다.


탑에 새겨진 탑문(塔文)

▲ 탑에 새겨진 탑문(塔文)


문화재청이 세운 탑문 재해석문

▲ 문화재청이 세운 위령탑 안내문


그것이 적절치 않다는 유족들과 뜻있는 사람들의 건의로 몇 년전 문화재청에서 그 뜻의 진위를 명확히 가리는 해설문을 옆에 세우기도 했다.
 

위령탑에서 공주시내 방향을 내려다 본 모습. 저기 왼쪽에 동학농민전쟁 알림터가 있다.

▲ 위령탑에서 공주시내 방향을 내려다 본 모습. 저기 왼쪽에 동학농민전쟁 알림터가 있다.


알림터 본관

▲ 알림터 본관


알림터에서 올려다 바라본 위령탑

▲ 알림터에서 올려다 바라본 위령탑


현재는 공주시가 나서서 동학혁명군 위령탑에서 공주시내 방향(부여 반대방향)으로 내려다 보면서 왼쪽 부분에 우금티전적 알림터를 마련해 두었다.
이곳 알림터는 동학농민전쟁의 배경과 현황, 당시의 시대상, 농민군의 활약상 등을 사진과 동영상, 지도 등을 통해 알려주는 시설로 꾸며져 있다.
 

알림터 내부

▲ 알림터 내부


각종 설명과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 각종 설명과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농민군이 지향한 방향은 봉건적인 생산관계와 수탈을 제거하고 외세를 배격하는 투쟁과정을 통하여 혁명의 방향으로 다듬어지고 발전해갔다.
탐관오리의 제거, 봉건적 폐단의 시정, 봉건제도의 폐지, 친일정권의 타도와 식민지화의 저지로 운동과 사상을 단계적으로 발전시켜나갔다. 특히 제2차 농민전쟁을 통하여 일본 침략세력을 몰아내려는 반제·반봉건 민족운동을 전개했으나, 당시 갑오정권과 일본세력 및 보수유생들에 의해 철저히 압살되고 말았다.
 

동학군의 활동과 이동경로를 알리는 지도

▲ 동학군의 활동과 이동경로를 알리는 지도.


다

▲ 동학운동의 전개과정을 소개하는 표지.


가 있다.

▲ 2차 농민군의 전개과정.


그렇지만 농민전쟁은 투쟁과정을 통하여 농민대중에게 봉건지배층과 일본 침략세력의 본질을 알게 했으며, 그들을 민족적·계급적으로 더욱 각성시키는 한편 광범한 대중을 반제·반봉건 투쟁세력으로 강화시켰다.
 
9월 하순께 논산에 모인 남접 북접 연합군은 공주를 향해 북상을 개시했다. 당시 공주는 농민군 진압에 동원된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 거점이었다.
농민군은 공주 외곽의 이인 효포 우금치 등지에서 약 20일간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공방전을 벌였으나,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을 견디지 못한 채 패퇴했고, 금구와 태인 전투에서 전봉준이 이끄는 핵심부대는 마지막 저항을 시도했으나 결국 패하면서 그들의 장대한 뜻, 그들이 꿈꿨던 하늘에 다다르는 인간세상의 꿈은 그대로 꺾이고 말았다.
 

1998년 공주에서 치러진 동학군 위령제

▲ 1998년 공주에서 치러진 동학군 위령제.


위령탑 앞에 동백이 파란 이파리를 보이며 바라보고 있다.

▲ 위령탑 앞에 동백이 파란 이파리를 보이며 바라보고 있다.


갑오농민전쟁은 조선 후기 농민항쟁을 통한 농민들의 각성과 성장을 바탕으로, 동학의 조직을 이용하여 봉건제도의 모순과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에 반대한 대규모의 반제·반봉건투쟁이라고 규정지을수 있다.

봉건지배층의 지주적 입장의 근대화노선과 농민적 입장의 근대화노선의 대결이었다고 보면 되는데 결과만 놓고 보면 어차피 근대화로 가는 과정에서 안흘려도 되는 피를 너무나 많이 흘렸다.
그리고 너무 많은 인명이 살상되는 비극을 치렀다.
그래서 동학농민전쟁은 두고두고 가슴아픈 역사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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