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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서해의 군사적 거점 당진 면천읍성

2021.03.17(수) 14:35:25 | 마패 (이메일주소:faron@hanmail.net
               	faron@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당진 지역은 서산, 태안 지역과 함께 삼국시대부터 중국으로 오고가는 중요한 교역로로 연결되는 거점이자 적을 막기 위한 군사적 거점으로 면천지역에는 백제 초기부터 교역을 보호하고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성이 구축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면천읍성의 축성은 기록에 의하면 고려시대 충렬왕 16년(1290)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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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시도기념물 제91호로 지정된 면천읍성은 동서남북 사대문을 갖춘 둘레 약 1336m 길이의 성으로 조선 세종 때에 왜구를 막기 위한 중요 거점으로 석성을 다시 복원하였고, 경종 때 중수돼 1914년까지 당진과 함께 지역 행정을 다스리던 곳으로 지위를 유지하였다.
 
서해의군사적거점당진면천읍성 2
  
면천읍성은 1906년 5월10일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관직을 사퇴하고 당진에서 의병을 일으킨 최구현이 면천읍성을 공격하여 일본군 수비대 및 관군과의 전투가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최구현이 이끌던 의병들은 일본군의 신식무기 화력에 밀려 소난지도로 물러난 뒤 일본군에 붙잡혀 희생된 아픈 기록을 간직하고 있다.
 
서해의군사적거점당진면천읍성 3
  
면천읍성의 주출입구인 남문은 성문의 앞을 빙 둘러쳐 성문을 방어하는 옹성을 갖춘 성곽으로 조성되었고 남문과 서문 위에는 문루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성벽에서 돌출시켜 쌓은 3개의 치성 흔적이 발견되었으나 원래는 7개로 보인다.
 
서해의군사적거점당진면천읍성 4
  
면천읍성 외벽에는 공사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기 위해 돌에 책임군현의 이름과 연도 축성구간이 새겨진 각자성돌이라고 불리는 읍성의 축조 시기를 파악할 수 있는 성돌이 발견되어서 그 구간의 부실이 발생하면 해당 군현에서 보수를 책임지도록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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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천읍성에 현재 발견된 각자성돌은 3곳으로 그곳 중 한 곳인 '기미년 옥천시민 장육십척 사촌'이라고 적혀 있는 각자성돌은 세종21년 기미년으로 확인되어 충청북도 옥천에서 축성한 구간으로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의 축성기록과 고고학적 문화재가 일치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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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천읍성 성벽 앞에는 '물이 가득 흘러서 바다로 모여 들어간다'라는 시경 구절에서 면천이란 이름을 가져왔다는 사연을 돌에 새긴 돌비석 조형물이 서 있어 면천이 예로부터 물이 가득할 정도로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는 곳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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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천읍성 서문 쪽에 자리잡은 풍락루는 면천관아의 문루 역할을 했던 누각으로 반월루라고 불렸으나 1852년 면천군수 이관영이 중수한 후 풍락루라고 명칭을 짓고 현판에 풍락루기를 남겨서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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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락루라고 명칭을 붙인 것은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을 담아 살기 좋은 땅에서 백성과 더불어 평안하고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붕괴위험이 있어서 1943년에 철거하였다가 철거 전의 사진자료를 토대로 2007년 2층 누각형태로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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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천읍성 남쪽에 2014년에 다시 복원한 남문은 옹성 형태로 구성되어 왜구의 공격을 막기 쉽게 하기 위해 건축된 성문이다. 그 옆에는 수로가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18세기 이후 성의 기능을 사실상 상실한 후 누각이 허물어지고 옹성을 따라 집이 지어졌다가 2009년부터 복원정비사업으로 복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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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천읍성 남문으로 안쪽에는 2017년 면천읍성 성안마을 조성을 위해 추진한 매장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조선시대 건물지 내에서 이총통과 기와들이 출토되어 지방의 군현을 지키는 속오군의 지휘관인 현감과 병방 군교들이 군무를 살피던 청사였던 장청 자리였음이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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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30년부터 제조를 시작한 이총통은 손으로 들고 사용할 수 있는 총 중에서 가장 큰 총으로 국조오례서례가 편찬된 성종 5년까지 제조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는 면천읍성의 축성 연대와 일치하고 있는데, 당진시에서 2017년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유구와 자료를 바탕으로 2018년 장청을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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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천읍성(충청남도 시도기념물 제91호)
-소재: 충남 당진시 면천면 성상리 1117-2
-문의: 041-350-3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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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천읍성에서 동쪽으로 약 1km 거리 면천면 성상리에 면천향교가 자리잡고 있어서 면천이 군사적·행정적 중심지이자 학문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음을 알게 해주는데 면천향교는 최초 창건 위치에서 이동하지 않은 몇 안 되는 향교로 조선 초기의 향교입지 형태를 규명하는데 귀한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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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기념물 141호로 지정된 면천향교는 태종 13년인 1413년에 지방의 유교 교육을 위해 세워져서 1716년(숙종 42년)에 면천향교의 대성전 서벽과 신문을 수리한 사실이 기록이 전하며 1983년 대성전을 보수하고 1985년 명륜당을 보수하고 1986년 동서재를 보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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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천향교는 전면에 넓은 들을 두고 약한 구릉지를 배경으로 전학후묘식 배치로 조성되었는데, 외삼문을 들어서면 중심축에서 약간 서로 치우쳐 명륜당이 배치되고, 명륜당 북측 좌우에 동재와 서재가 배치되어 있어 북쪽에 한 단 높은 대지를 조성하여 대성전과 동서 양무를 배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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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천향교(충남기념물 제141호)
-주소: 충남 당진시 면천면 동문2길 36-7
-전화: 041-350-3583
 
서해의군사적거점당진면천읍성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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