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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한말 항일을 드높게 외쳤던 면암 최익현

청양군 정산면 면암의 사우 '모덕사'를 찾아

2020.11.16(월) 20:07:56 | 오수금 (이메일주소:sjhdk334@hanmail.net
               	sjhdk334@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면암 최익현. 그를 간단히 요약하면 한말 외세가 이 땅에 밀려올 때에 가장 줄기차게 저항운동을 벌인 대표적인 유림이었다. 그리고 끝내 유폐된 땅인 대마도에서 순국했기 때문에 민족운동의 선봉으로 꼽혀왔다.
 
면암 선생이 순국한 때는 1906년 음력 11월17일이다. 양력으로 환산하면 올해 12월31일. 
  
모덕사 표지석
▲모덕사 표지석
 
반성 없이 여전한 일본의 도발을 보면서 이때쯤 면암 선생을 떠올려 보는 것도 시기적절할 것 같아 면암선생 사당인 충남 청양의 ‘모덕사’에 다녀왔다.
  
조선 후기 애국지사인 면암 최익현(1833~1906)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우는 1914년에 건립되었다. 현판의 글자는 고종 황제가 내린 글 가운데 '면암의 덕을 흠모한다[艱虞孔棘慕卿宿德]'라는 구절에서 '모(慕)'자와 '덕(德)'자를 취한 것이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52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에는 면암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유품도 전시되어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영당(影堂)을 비롯하여 고택과 중화당·장서각(藏書閣)·춘추각·유물전시관 외에 관리사무소가 있다. 매년 4월 13일 항일의거기념 면암 최익현의 추모제가 열린다.
  
모덕사에 세워져 있는 면암 동상
▲모덕사에 세워져 있는 면암 동상
 
모덕사 춘추각
▲모덕사 춘추각
 
면암이 실제 거주했던 고택
▲면암이 실제 거주했던 고택
 
최익현은 경기도 포천 출신이다. 그는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오른 후 줄기차게 항왜를 외쳤다. 1876년 ‘병자지부복궐소(丙子持斧伏闕疏)’라는 상소를 올려 일본과 맺은 병자수호조약을 결사 반대했다. 그 덕분에 면암은 흑산도로 유배되었으나 그 신념과 신조는 꺾이지 않았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날 때까지 약 20년 동안 침묵을 지켰다. 이 시기는 일본과의 개국 이래 임오군란·갑신정변·동학운동·청일전쟁 등 연이어 일어나 국내외 정세가 복잡했던 때이다. 그리고 마침내 1895년 을미사변의 발발과 단발령이 단행되자 면암은 오랜 침묵을 깨고 ‘청토역복의제소(請討逆復衣制疏)’를 올려 항일척사운동에 앞장섰다.
 
이때 개화정책 폐지, 박영효를 비롯한 개화파 처단, 역적을 비호하는 일본에 대한 문죄 등을 요구했다. 단발령 시행 때는 더욱 격렬하게 저항하며 ‘상투를 자르는 짓은 정신을 좀먹는 지름길이므로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외쳤다.
  
면암의 유품을 전시중인 대의각
▲면암의 유품을 전시중인 대의관
 
대의관 내부
▲대의관 내부
 
면암이 사용한 초갑(문서가방)
▲면암이 사용한 초갑(문서가방)
 
대마도로 끌려가기 직전의 면암 모습.
▲대마도로 끌려가기 직전의 면암 모습
 
사모, 각대, 낙경만직 휘호
▲사모, 각대, '낙경만직' 휘호
 
겨울에 추위를 막은 내의 같은 '토수'
▲겨울에 추위를 막은 내의 같은 '토수'
 
호문포단
▲호문포단
 
연적과 붓 벼루 등 각종 문구류.
▲연적과 붓 벼루 등 각종 문구류
 
고종에게 올렸던 상소문
▲고종에게 올렸던 상소문
 
면암이 대마도에서 굶어죽기로 결심하고 고종에게 마지막 유서 형식으로 쓴 상소인 '유소' 번역문
▲면암이 대마도에서 굶어죽기로 결심하고 고종에게 마지막 유서 형식으로 쓴 상소인 '유소' 번역문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면암은 이를 일제의 침략이자 국권 침탈로 인식했다.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를 올려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고 망국조약에 참여한 외부대신 박제순 등 5적 처단을 주장했다.
 
최익현은 1906년에 이르러 그간의 상소운동을 청산하고 대일 투쟁 방식을 전환하여 무력항쟁에 나서면서 전국 각지에 총궐기할 것을 호소하는 문서를 만들어 뿌렸다. 

면암 자신도 호남유생 임병찬 등과 손잡고, 장성 유생 기우만의 협조를 얻어 전라북도 태인에서 의병항전에 돌입했다. 그러나 순창에서 진위대의 공격을 받아 체포되어 유배지 대마도로 끌려갔다. 면암은 거기서 74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사당과 영당
▲사당(모덕사)과 영당(성충대의)
 
면암의 영정이 있는 영당 내부와 비문
▲면암의 영정이 있는 영당 내부와 성충대의의사비 비문
 
그의 운구행렬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목숨을 바쳐 자기 몫을 다한 지사의 죽음은 사람들에게 애국심과 의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최익현의 위정척사운동은 이후 독립운동과 민족주의로 전화하는 한편, 끝까지 항전하는 비타협적 투쟁정신으로 이어졌다.
  
최익현을 주제로 한 시가 있다.
한국일보 주최 신춘문예에서 1984년에 당선작으로 시이다. 
  
  엎드려서 울고 있다
  낮게 내려앉은 대마도의 하늘
  성긴 눈발, 춥게
  뿌리고 있다
 
  바라보고, 또 바라보아도
  서릿발 같은 바람 소리만
  어지럽게 쌓이는
  나라의 산하(山河)
 
  불끈 쥔 두 주먹이 붉은
  얼굴을 감춰서
  설악(雪嶽) 같은 울음이 가려지겠느냐
  파도 같은 분노가
  그만 가려지겠느냐
 
  어둡게 쓰러지며 울고 있다
  희디흰 도포자락
  맑게 날리며
  성긴 눈발, 뿌리고 있다
 
  눈 감고 부르는
  사랑이 무심한 시대에
  하염없이 하염없이
  -'최익현'(오태환)

면암이 받은 대한민국 건국훈장과 훈장증(아래)
▲면암이 받은 대한민국 건국훈장과 훈장증(아래)
 
한말항일을드높게외쳤던면암최익현 1
 
면암의 의기 넘치는 항일구국투쟁을 인정해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최익현의 대의비인 춘추대의비(春秋大義碑)가 현재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에 있다고 한다. 일본의 도발이 여전히 계속되고, 대한민국 국민들의 반일, 일본상품 불매운동이 계속되는 이 시점에 면암 최익현 선생을 가슴 깊이 추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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