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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선조들의 풍모와 행적, 역할 등을 한눈에

충남역사박물관의 초상화 전시회를 보고

2020.10.29(목) 17:09:54 | 임정화 (이메일주소:dsfjkjfsjf@hanmail.net
               	dsfjkjfsjf@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공주에 있는 충남역사박물관에는 충남의 역사에 관한 이런저런 귀중한 자료가 많이 있다. 또한 시시때때로 특별전을 열어 보통때는 어디가서 쉽게 보기 어려운 유물이나 문화재도 전시회를 열어주기 때문에 자주 찾는다.
  
지금 충남역사박물관 2층 전시실에 가면 충남에서 태어나 자랐거나, 조선시대 충남지역 출신으로 한양에 올라가 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분, 혹은 후학을 양성한 학자 등 다양한 분들의 초상과 업적(행적)을 전시하고 있다.

옛 선현들의 발자취는 물론, 당시 그분들의 풍모를 볼 수 있는 초상화와 몇 가지 중요한 유물 전시회를 한번 관심 가지고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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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역사박물관 전경. 이제 이곳에도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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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복도에 들어서면 벽면에 이렇게 충남역사박물관의 역할과 위상을 알 수 있는 대형 알림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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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를 전시중인 2층 전시관 모습. 넓은 홀 벽면에 여러분의 초상이 전시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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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먼저 만나는 죽리 김이교를 알리는 그림이다. 왜냐면 김이교는 조선시대 마지막 조선통신사(외교사절단 책임자)로 일본을 다녀온 사람이고, 당시 일본 여정을 담은 신미통신일록 등 여러 유품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을 정도다.
   
조선통신사는 국왕의 국서를 가지고 일본으로 파견된 외교사절단이다.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약 200여 년 간 조선통신사는 12회 일본을 방문하였다고 한다. 수행 인원은 정사(正使)·부사(副使) 등 총 400~500명으로 구성되었다.
 
기간은 대개 6개월~1년이 소요되었다. 한양을 출발하여 부산까지는 육로로 간 뒤, 부산에서부터는 대마도주의 안내를 받아 해로를 이용하였다. 대마도를 거쳐 시모노세키를 통과하고 일본 각 지역의 접대를 받으며 지금의 도쿄로 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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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두 점 모두 다 죽리 김이교 초상화이다.
 
1811년(순조 11) 신미통신사 정사를 역임한 이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오른쪽을 바라보며 앉은 반신상으로 초록색의 관복을 입고 있으며, 허리의 관대는 종2품 이상이 차는 금장식의 각대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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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가신의 공신도상이다. 홍가신은 충남 아산 출생으로 1596년 홍주목사 재임 시 일어난 이몽학의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청난공신 1등에 녹훈되어 공신도상이 제작되었다.

오사모에 기러기 두 마리와 모란꽃, 구름이 그려져 있는 흉배를 부착한 흑색 단령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으며, 금장식의 삽금대를 착용했다. 오른쪽 상부 여백에 '만전 홍 선생 64세 상, 신해 4월 일 개모'라고 쓰여 있다. 이 말은 1604년에 그려진 원본을 1791년에 다시 그린 초상화라는 뜻이다. 원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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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득의 공신도상이다. 임득의는 1596년(선조 29)에 홍주목사 홍가신을 도와 이몽학의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청난공신 3등에 녹훈되어 공신도상이 제작되었다.
 
오사모 등에 단령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으며, 사모 양 날개의 문양은 운보문이다. 흉배에는 호랑이가 그려져 있고, 그 아래 은장식의 삽은대를 착용했다. 소매 끝에 흰색 포 자락이 드러나 있다. 양 다리를 넓게 벌려 앉은 자세이며, 트인 단령 사이로 왼쪽 무릎이 불쑥 솟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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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재 윤증의 측면 전신 좌상 초상이다. 윤증은 조선 숙종 때의 성리학자로, 유계와 송시열, 송준길에게 수학하였고, 예론에 정통하였으며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사방관에 도포 차림으로 얼굴과 의복 모두 선 위주로 그리고 명암 표현은 짙게 하지 않았다. 상투와 머리가 살며시 비치는 검은색 사방모와 허리끈, 옷 주름선으로 표현한 흰색의 도포가 잘 어우러졌다. 윤증의 초상 제작 과정이 기록된 ‘영당기적’에 따르면 1744년 당대 어용화사인 장경주가 윤증이 83세가 되던 때 화사 변량이 그렸다는 윤증 초상을 옮겨 그린 것이다. 1711년 그려진 원본 초상화는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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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증의 반신상 초상이다. 김만증은 충남 논산 출생으로 김장생의 증손이며,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평상복 차림인 심의에 복건을 쓰고, 공수자세를 취했다. 후덕한 얼굴과 품이 넉넉한 심의에 감싸인 당당한 풍채가 인상적이며, 흰 머리칼과 수염으로 미루어 노년기의 모습이다. 광산김씨 문중에서 대대로 보관해 온 가전 유물로서, 17세기의 초상화법을 간직하고 있다. 화면에 드러난 풍모와 인상으로 미루어 김만증이 세상을 떠나기 전인 18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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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벽의 상반신 초상이다. 김두벽은 충남 홍성 출생으로 김세진의 아들이며, 학주 김홍욱의 손자로 추사 김정희의 고조부인 김홍경의 숙부이다.

오사모를 쓰고 단령을 입고 있으며, 공수 자세를 취한 반신상이다. 흉배는 관대에 가려져 있다. 관대는 정3품의 관대인 은장식의 삽은대를 띠었다. 사모의 높이는 상당히 높아 조선후기의 모제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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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박씨요여이다. 이 요여를 설명하기 위헤서는 성삼문의 일생을 잠깐 알고 가야 한다. 성삼문은 세조 때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참화를 당하면서 그의 동생과 아들 등이 모두 죽임을 당하여 혈손이 끊겼다. 성삼문의 부인 김씨는 관비로 끌려가서도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김씨가 죽은 후에는 외손의 가계에서 제사를 받들다가 임진왜란 때 신주를 땅에 묻었다고 한다. 1672년 인왕산의 바위가 무너지면서 묻혀 있던 성삼문의 신주가 발견되었고, 이 신주는 우암 송시열 등의 의견에 따라 홍주 노은서원에 봉안되었다.
 
노은서원이 훼철됨에 따라 성삼문의 신주를 모실 곳이 없게 되자 외손인 박진하가 노성 당호재로 옮겨 봉안하였다. 1903년에 칙령에 의해, 성삼문의 봉사손이 결정되면서 창녕성씨 집성촌인 연기군 금남면 달전리 사위현 문절사로 옮겨졌다.
 
무안박씨요여는 1871년 성삼문의 신주를 홍주의 노은서원에서 논산 당호재로 옮겼던 가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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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거의 문집인 '노서유고' 목판이다. 1712년 노강서원에서 목판으로 간행되었는데, 1716년 정치적 사유로 목판이 훼손되었다. 그 후 경종 때 개간이 허락되자 이 시기를 전후로 해서 훼손되었던 부분의 보각이 이루어졌다. 현재 노서유고의 목판은 573개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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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황 부조지전 편액으로 정조 때 4대 봉사가 끝난 윤황의 사판을 옮기려 하자 정조가 유학의 부조묘를 세우고 하사한 것이다. 부조묘는 불천위 제사를 모시는 사당리이다. 국왕으로부터 불천위 제사를 허락받는 것은 더없는 명예이고, 종가의 위상과 정체성을 확립시켜 주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충남역사박물관의 초상화와 몇몇 유물들 전시를 통해 우리 충남지역 선조들의 풍모와 당시 행적, 역할 등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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