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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봉오동·청산리 전투 100주년 기념 전시 '나는 독립군입니다'

독립전쟁을 이끈 독립군의 생생한 기억과 기록

2020.08.17(월) 21:16:06 | 보라공주 (이메일주소:eyeful3535@naver.com
               	eyeful3535@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 함성이 독립전쟁의 도화선이 되어 무장을 하고, 독립전쟁인 봉오동·청산리 전투를 치른 지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천안 독립기념관 제7전시관 특별기획전시실에서는 10월 25일까지 '나는 독립군입니다' 전시를 통해 어려운 상황에서도 독립을 간절히 바라며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독립군의 이야기를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봉오동청산리전투100주년기념전시39나는독립군입니다39 1▲독립전쟁 100주년 특별기획전 '나는 독립군입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만주는 독립운동을 위한 준비의 땅이었습니다. 간도 일대에는 민족교육 군사훈련 양성기관이 세워졌습니다.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는 그 중심 기관으로 민족의식을 갖게 하고 교육 등 문화활동을 통해 정신적인 준비를 해나갑니다. 만주에서 군사교육을 하며 독립전쟁을 준비하던 10년 동안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 간부로 양성된 인원만 3,500명에 달했고, 이들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대전자령전투를 주도하게 됩니다.
 
봉오동청산리전투100주년기념전시39나는독립군입니다39 2▲농민, 노동자, 학생 가리지 않고 독립전쟁에 합류
 
3.1운동 다음해인 1920년 6월 7일 중국 봉오동에서 최초로 일본 정예군을 격파한 승리의 전투입니다.
 
당시 많은 이들이 의병을 조직해 한반도 지배 야욕을 노골화하던 일본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는데요, 일본의 무차별적인 학살과 탄압이 극에 달하자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만주 일대로 이주하게 됩니다. 1910년 국권을 피탈당하면서 만주 지역 의병들은 이름을 독립군으로 바꾸고 본격적인 독립전쟁의 의지를 불태우게 됩니다.  
 
봉오동청산리전투100주년기념전시39나는독립군입니다39 3▲봉오동으로 출동하는 일본군 제19사단 월강추격대(왼쪽)와 두만강을 건너는 일본군 소속 제19사단
 
이들은 낮에는 낫과 곡괭이로 농사를 지으면서 밤에는 죽창과 총칼을 들고 군사훈련을 했습니다. 이렇게 10년간 전의를 다지던 중 1919년 3.1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번져나가자 어제의 농민이 오늘의 독립군이 되어 일제에 항거하게 됩니다. 
 
봉오동청산리전투100주년기념전시39나는독립군입니다39 4▲만주와 연해주로 이주하는 한인
 
봉오동청산리전투100주년기념전시39나는독립군입니다39 5▲백서농장에서 신흥무관학교 교관과 학생들의 영농 광경(위) 및 신흥강습소가 있었던 류허현 삼원보 전경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끈 홍범도는 평민 출신의 의병장으로 총알로 바늘 귀를 뚫는 사람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고 합니다. 포수였던 홍범도는 대한제국 군대 강제해산과 의병활동을 못하게 하기 위해 일제가 민간 총기 강제 회수에 분노해 1907년 후치령전투에서 일본을 공격합니다. 그를 따르던 포수를 이끌며 의병대장이 된 홍범도는 1907년부터 1년 동안 일본과 수십 차례 교전을 통해 하늘을 나는 홍범도라고 알려지며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습니다. 
 
봉오동청산리전투100주년기념전시39나는독립군입니다39 6▲홍범도 일지(이인섭 필사본)
 
1920년 봉오동으로 일본군을 유인하기로 하고 자신이 이끌던 대한 독립군을 비롯해 최진동, 한경세 등과 연합해 일본군 격퇴 작전을 준비합니다. 봉오동은 삿갓을 뒤집어 놓은 지형이었습니다. 봉오동을 포위하듯 독립군을 매복시킨 뒤 소수의 병력만으로 총격전을 벌여 일본군을 봉오동으로 유인해 오는 것이 홍범도 장군의 작전이었습니다.
 
봉오동청산리전투100주년기념전시39나는독립군입니다39 7▲홍범도, 봉오동전투 회고(홍범도일지)
 
어제는 농민이었던, 어제는 포수였던, 어제는 노동자였던 평범한 백성들이 만들었던 대한민국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얻어낸 독립군의 첫 번째 승리 봉오동전투입니다. '우리 독립을 최후까지 외치다가 죽은 후에야 그쳐야 한다.'라는 단결력이야말로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끈 저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봉오동청산리전투100주년기념전시39나는독립군입니다39 8▲독립군의 피 묻은 태극기
 
청산리전투는 봉오동전투 직후인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치러진 전투입니다.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군 3개 사단을 격파한 전투입니다. 6일 동안 10여 회에 걸쳐 일본 정규군 3천여 명을 사살하고 독립군 역사상 최대의 승리를 거둔 전투입니다.
 
봉오동청산리전투100주년기념전시39나는독립군입니다39 9▲이우석, 청산리 전투 회고(이우석 수기)
 
청산리 계곡은 25km가 되는 깊은 밀림과 같은 계곡이었습니다. 1지대는 김좌진 장군이 맡고, 2지대는 이범석 장군이 맡아 매복을 했다가 쫓아오는 일본군을 치는 게릴라 작전을 쓰게 됩니다. 6일 동안 도망가면서 계속 공격을 하게 됩니다.
 
봉오동청산리전투100주년기념전시39나는독립군입니다39 10▲전투에 사용된 무기들
 
봉오동청산리전투100주년기념전시39나는독립군입니다39 11▲청산리전투 민족기록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동아시아 최강의 일본군을 상대로 험준한 지리를 활용하고, 우수한 지휘관의 전술과 전략이 있었기에 청산리전투의 승리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김좌진 장군은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청산리전투를 통해 우리 민족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던 상징적인 인물이 되고 있습니다. 
 
봉오동청산리전투100주년기념전시39나는독립군입니다39 12▲김좌진 약력서          
 
또한, 독립군 부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음식을 준비해 총탄이 빗발치는데도 나아가 군인들에게 음식을 전달하고 권하였다고 합니다. 이우석 수기에 의하면 '치맛자락의 주먹밥을 던져주는 애국 부인들의 애국심이 청산 전쟁의 승전을 시켰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청산리전투는 독립군뿐만 아니라 온 동포가 합심해 얻은 승리였습니다.
 
봉오동청산리전투100주년기념전시39나는독립군입니다39 13▲이회영 선생의 부인 이은숙 여사 회고록
 
봉오동청산리전투100주년기념전시39나는독립군입니다39 14▲김동삼 선생의 며느리 이해동 여사 회고록
 
이 땅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100년 전 모든 것을 걸었던 독립군 분들을 잊지 않겠습니다. 매서운 추위와 척박한 땅에서의 가난도 이겨낸 독립에 대한 불꽃 같은 그 열정을 생생하게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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