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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두 대에 걸쳐 천자가 나는 자리, 남연군묘에서 되돌아보는 우리 역사

2020.06.30(화) 21:05:30 | 엥선생 깡언니 (이메일주소:jhp1969@naver.com
               	jhp1969@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6월 29일(월), 국립중앙박물관 페이스북 게시물에 국가민속문화재 제65호가 소개됐다. 게시물에 의하면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착용했었다는' 기린문수흉배'에는 예로부터 행운과 복을 가져다주는 상서로운 상상의 동물 기린이 수 놓아져 있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접하니 잠시 잊고 있던 흥선대원군과 관련된 충청남도 기념물 제80호 '남연군묘(南延君墓)'에 다녀온 일이 떠올라 포스팅을 하게 되었다.
 
가야산에 위치한 남원군 묘 가는 길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 위치한 남연군묘 가는 길
 
경상남도 합천군에 소재한 가야산국립공원만큼은 아니지만, 예산군의 가야산(伽倻山, 678m) 역시 명산으로 알려져 있다. 등산을 즐기시는 분들은 가야봉, 석문봉, 옥양봉으로 이어지는 가야산 탐방코스의 매력을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세 곳을 병풍처럼 두른 곳에 고종 황제의 할아버지인 남연군 '이구'의 묘소가 위치해 있다.
 
이구(?~1822)는 인조의 셋째 왕자 인평대군의 후손으로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산군에 입양되어 남연군에 봉해진 왕족이다. 아버지 은산군이 모함을 받아 제주도에서 죽자 불우한 삶을 보냈다고 한다.

남연군 묘비(신도비)
▲남연군 비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91호다
 
'남연군 비'는 남연군묘에서 약 700m 떨어진 구릉지에 세워져 있었다. 영의정 조두순이 비문을 지었다고 한다. 비신 위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지붕 모양의 이수가 올려져 있었으며, 비신에는 '남연군충정(南延君忠正)이라고 쓰여 있으며, 4면에 작은 글씨로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두 대에 걸쳐 천자가 나는 자리, 남연군묘에서 되돌아보는 우리 역사 1
 
남원군 묘 전경
 
두 대에 걸쳐 천자가 나는 자리, 남연군묘에서 되돌아보는 우리 역사 2▲남연군묘 전경
 
위로 좀 더 오르자 남연군묘가 보이기 시작했다. 높은 언덕에 예상보다는 작은 반구형 봉분이 자리잡고 있었다. 본래 경기도 연천 남송정에 있던 것을 1846년 이곳으로 이장했다고 한다.
 
풍수지리를 믿고 있던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아버지 남연군의 무덤 자리를 찾기 위해 지사(地師) '정만인'에게 명당을 부탁하고, 전국을 살펴본 지사는 '두 대에 걸쳐 천자가 나는 자리[二代天子之地]'로 이곳을 지목했다고 한다. 남연군의 무덤을 이장한 7년 후 차남 명복(命福)이 태어났고, 철종이 후사 없이 돌아가자 종손이었던 명복이 12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르니 그가 조선왕조 26대 임금이자 대한제국 1대 황제인 고종이다.
 
남연군묘를 둘러싼 드라마틱한 일들을 떠올리며 묘소 인근을 둘러보고 있자니 풍수지리에 문외한이라 해도 볕 잘 들고, 막힘없이 앞이 탁 트여 있고, 철벽을  두른 듯 산봉우리로 둘러싸인 이곳이 좋은 땅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석주
▲석주
 
양 형상의 석물
▲양 형상의 석물
 
하대석에 사군자가 새겨진 석등
▲하대석에 동서남북으로 사군자가 새겨진 석등
 
봉분과 묘비 외에 석주와 양의 형상을 한 석물 2점, 일반적인 석등 하대석과 달리 4면에 사군자를 새긴 석등이 배치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묘소 앞에 커다란 암석들이 박혀 있어 의아했는데, 암석의 위치를 잘 살피면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이라 하니 원래 있던 자연석인지 아니면 의도를 갖고 거석들을 옮겨온 건지 궁금증은 점점 더해졌다.
 
남연군 묘에서 바라본 가야사지
▲남연군묘에서 바라본 충청남도 기념물 제150호인 '가야사지'
 
원래 덕산 가야산에는 가야사(伽倻寺)라는 큰 절이 있었으며, 남연군 묏자리에는 절의 석탑이 서 있었다고 전해진다. 흥선대원군은 부친의 묘소를 현재의 자리로 안장할 때 가야사를 폐사하고, 석탑 또한 이때 철거했다고 한다.

예산군에서는 2012년부터 2014년까지 3차례에 걸쳐 가야사지 발굴조사를 했다고 한다. 발굴조사로 8동의 건물지를 확인했으며, 건물지 내부에서 소형의 청동불두(靑銅佛頭) 1점과 소조나발(塑造螺髮)이 다량으로 확인됐을 뿐만 아니라 '가량갑(사)'명 명문기와를 비롯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특히 3차 발굴조사에서는 남연군묘의 제각시설도 확인했는데, 제각시설의 확인으로 가야사지를 일부 파괴하고 조성된 남연군묘 이장에 대한 기록을 증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남연군묘를 찾은 날, 묘소 뒤편에서 벌목 작업이 한창인지라 궁금하여 알아보니 그곳에서 집터가 발견되어 발굴을 위한 준비 중이라고 한다. 주변 발굴이 계속되면 남연군 묘소 이장 전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날 것으로 기대된다.
 
보호각으로 내려가는 길
▲보호각으로 내려가는 길
 
보호각
▲'남은들 상여' 보호각
 
남연군 묘소 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오니 보호각이 보였다. 보호각에는 국가민속문화재 제31호인 '남은들 상여' 복제품이 보관되어 있다. 남은들 상여는 흥선대원군이 남연군의 묘를 옮긴 후, 덕산면 광천리 마을에 하사했다고 전하는 궁중식 상여다. 
 
대원군이 종실 중흥이라는 큰 뜻을 품고 남연군의 묘를 덕산 가야산으로 옮길 때, 시신을 넣은 관을 운반하는 데에는 500리 길을 따라 한 지방을 통과할 때마다 그 지역 주민이 동원되어 각 구간을 연결하여 모셔가는 방법을 택했다고 한다. 마지막 구간을 담당한 예산군 덕산면 광천리 남은들 주민들이 매우 극진히 모셨기에 그에 대한 보답으로 상여를 마을에 주었고, 이후로 마을 이름을 따 '남은들 상여'로 불렸다고 한다.
 
진품은 국립고궁박물관에 기탁보관중이며, 이곳 상여보호각의 복제품은 2012년 중요무형문화재 74호 전흥수 대목장이, 유소(매듭)는 무형문화재 32호 배순화 매듭장이 제작하여 전시 중이다.
 
남연군묘를 찾으니 정조 승하 이후에 외척 세력의 등장과 외세 출몰, 격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스러져가는 국운을 맞이하는 과정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었다. 되풀이된다는 과거의 사실, 역사를 통해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반성할지 천천히 그리고 곰곰이 헤아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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