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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헌종대왕태실을 찾아서

일제강점기 때 민족정기 말살을 위해 훼손된 '태실'

2020.02.13(목) 10:16:51 | 유정민 (이메일주소:mm041@daum.net
               	mm041@daum.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역사적인 가치를 지닌 것들 중 '태실'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헌종대왕태실
▲헌종대왕태실(충남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 산6-2 소재)

'태실'이란, 왕실에서 자손이 태어나면 그 태(胎)를 봉안하는 곳을 말합니다. 그리고, 왕에 즉위하게 되면
그 태실의 내부와 외부의 장식을 바꾸어 봉하는 '태봉'이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태(胎) 는 태어난 아기의 생명의 끈이며, 근원이 된다고 하여서 오래 전부터 소중하게 다루어졌던 전통이 이러한 '장태문화'로 발전하였다고 합니다.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전국의 왕자나 공주, 왕비의 태실뿐만 아니라, 개인 태실 등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문화를 간직한 곳이 150여 곳이나 된다고 합니다.


명종대왕태실▲명종대왕태실(조선 13대 임금, 2018년 3월 보물 제1976호 지정, 사진 문화재청 홈페이지)
 
이 글을 준비하면서 충청남도에는 '조선 임금의 태실만 9곳'이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위 사진과 같이 잘 보존되어 문화재적인 가치를 인정받은 명종대왕태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헌종대왕태실과 극적인 대비로 보여지는 것은 저만의 느낌일까요?

황폐하여진 태실들에 대하여, 일제강점기 때의 아픔을 이야기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왕실을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이왕직'이라는 기관을 설치하고, 1928년 전국에 안치되어 있던 조선 왕 22위, 왕자 공주 32위를 파헤쳐 서삼릉으로 옮겼을 때 많은 태실들이 훼손되었습니다. 헌종대왕태실도 이때 훼손되었으며, 현재도 미확인되는 태실이 있다고 합니다.

서삼릉태실연구소 김득환 소장의 말에 의하면, “전국 각지 명산에 조성됐던 태실은 조선왕실에서 관리를 임명, 엄격히 관리해 왔는데, 1928년 조선총독부가 민족정기 말살을 위해 이곳으로 모아 훼손한 것”이라 한다. 그는 “일제는 조선 왕조의 존엄성을 비하하고, 백성들에게 조선의 멸망을 확인시키려는 음모에서 전국의 태실을 파괴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일제의 유린 현장, 서삼릉 태실(胎室) 아픔 잊지 맙시다”, 중앙일보 기사(2018.02.28) 중에서

힘없는 민족의 안타까운 현실일 뿐입니다.
그런 아픔을 간직한 태실은 그 무늬와 모양이 조선시대 풍수와 미술양식을 알 수 있는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 헌종대왕태실 찾아가기

이정표▲ 이정표 

이정표를 만났으나 개인 집 앞으로 진입하기가 난감하였습니다. 그래서 진입하기 안전한 곳을 찾아 봅니다. 

옥계

옥계새마을회관에서 맞은편에 주차하고 안내지도를 확인한 뒤 저수지 데크길 따라 지도의 노란색 길과, 빨간색 길 2군데로 찾아 갈 수 있습니다. 두 길은 모두 헌종대왕태실 한 곳에서 만나게 됩니다.
 
ㄴ▲노란색 길(사진 시계 방향)

편안한 저수지 데크길에 징검다리도 건너며 산의 비탈진 길을 따라 약 600m 오릅니다. 
 
ㅂ▲빨간색 길(사진 시계 방향) 

저수지 옆 데크길을 따라 가다가 이정표를 보시면 바로 개인의 집앞입니다.
주인께, "실례합니다." 한 마디 건네고, 저수지 정자 방향으로 가면 사진의 이정표를 발견하게 됩니다.

마지막의 해설판은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 우측 비닐하우스 사잇길로 가면 만날 수 있습니다. 물론, 해설판 옆으로 올라가도 헌종대왕태실까지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세월의 때가 낀 해설판이 안타까움을 주더군요. 개인적으로 이 해설판은 철거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용이 뜸한 곳의 때묻은 해설판보다는 헌종대왕태실 위치에 또 하나의 해설판이 있으니까요.
 
계속 저수지를 낀 길을 따라가면 두 길 모두 하나의 이정표를 만나게 됩니다.

마지막 이정표▲헌종대왕태실 직전 이정표
 
이정표를 따라 올라서니 나무들에 둘러 쌓인 '헌종대왕태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헌종대왕태실 1▲헌종대왕태실 1
 
헌종대왕태실▲헌종대왕태실 2
 
얼마 전 국가문화재 보물로 지정된 '명종대왕태실'과는 참 많이도 다른 모습입니다. 소박하다고 해야 할까요? 왠지 부족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네요.
 
■ 헌종 (조선 24대 임금)

헌종(1827~1849)은 4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8세에 임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인 순조 때부터 이어진 세도정치의 희생양이 되어 버린 허수아비 왕이란 이름을 가지게 됩니다. 이 시기에 조선은 세금제도가 엉망이 되고, 이양선이 나타나는 등 나라 안팎으로 혼란이 계속 이어집니다. 그런 험난함 속에서 짧은 생을 마감한 비운의 임금 이었습니다.
  
헌종대왕태실 3▲헌종대왕태실 3

태실을 두른 난간도 있을 법한데 없어지고, 난간을 받치던 기둥이 있었던 자리로 짐작되는 팔각형 기단부
구멍에는 솔잎만을 가득 담고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헌종대왕태실 4▲헌종대왕태실 4 (태실비는 없고, 귀부만 남아 있는 모습)
 
귀부(거북 형상의 비석 받침대)의 등 위에 있어야 할 태실비가 없습니다. 그곳엔 고인 물만이 채우고 있습니다. 예산군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2015년 수중지표조사를 실시하여 바로 앞 옥계저수지에서 태실비의 일부를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나머지 부분들도 우리 곁으로 돌아와 귀부 등 위에 우뚝 섰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말똥말똥한 눈동자에 어금니를 내밀고 발톱을 세운 귀부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헌종대▲헌종대왕태실 (귀부의 머리부분)

옥계저수지 한쪽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긴 듯한 귀부의 옆 모습에서는, 자신의 등 위에 올려 놓아야 할 업보인 태실비의 나머지 한 조각이 어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애틋함을 담고 있는 듯합니다.
 
헌종대왕태실을찾아서 1▲옥계저수지
 
영광과 번영을 기리던 태실의 흔적들이, 지금까지는 아픔과 통한을 겪으며 훼손되어 왔습니다.

이제라도 관민이 힘을 합하여 세심한 관심을 가지며, 더 이상 그런 아픔과 비극을 겪지 않도록 보존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후손들에게 웃을 수 있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저 물속 어딘가에서 태실비 나머지 조각을 찾았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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