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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공주지역 사림문화의 선구자 '고청' 선생 유지(遺址) 탐방기

공주 박약재,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52호로 지정되다!

2019.12.11(수) 15:44:17 | 엥선생 깡언니 (이메일주소:jhp1969@naver.com
               	jhp1969@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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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역사문화연구원에서 발간한 『삶의 지혜 공간, 충현서원』에 의하면 고청 서기(孤靑 徐起, 1523~1591)는 조선 중기 학자로 자는 대가(大可), 호는 고청초로 또는 구당(龜堂)이며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서기의 고향은 충청도 홍주이나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 고청봉(孤靑峰)을 자신의 호로 정할 만큼 이 마을과 각별하다. 1523년(중종 18년) 당시 홍주목에 속한 보령 남포 제석동에서 태어났다. 청년기에 접어들어서 유교의 제자백가와 불교의 선학에 심취해 토정 이지함(1518~1578)으로부터 유학의 깨달음을 얻었다 한다.

30대 초반 이지함과 김굉필의 학통을 이은 이중호(李仲虎)의 문하에서 3년간 성리학의 기본 경전을 수학하였으며 귀향해 보령시 미산면 옥현리에 강신당(講信堂)이라는 향약청을 짓고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보급하고자 했다.

하지만, 서기의 뜻은 기존 세력의 방해로 펼치지 못하고 신변의 위험마저 느끼자 가족을 이끌고 지리산 골짜기 홍운동(紅雲洞)으로 은거하게 된다. 이후 심충겸(沈忠謙)의 권유로 공암 남쪽 거북골에 거처를 정한다.

그가 공주에 정착하게 되자 각지의 제자들이 계룡산 자락으로 몰려들었고, 서기는 연정(蓮亭)이라는 서실을 열고 많은 제자를 길러 약 20여 년간 초창기 공주지역 사림문화 형성에 공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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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시 반포면 공암장터길 28-6에 위치한 충현서원(忠賢書院)은 충청남도에서 최초로 건립된 사액서원이다. 1581년(선조 14년) 서기 선생이 주자의 영정을 모시고 창건했으며, 1624년(인조 2년)에 충현이라는 현판을 사액 받았다. 서기 선생이 50세 무렵 정착한 공암에서 제자들과 함께 공부하기 위해 세워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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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청봉 아래에 있는 공암굴은 높이 6.6m, 길이 약 3.6m의 자연동굴로 일명 굴바위라고 한다. 서기 고청 선생이 더위를 피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그의 호를 따서 '서고청굴' 혹은 '고청굴'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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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10일 수령 400년을 넘긴 느티나무 두 그루가 마을을 지키는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 연정길을 찾았다. 2019년 서기 선생이 후학을 양성한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기념물 제31호 '공주 박약재(博約齋)'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52호로 지정 고시되었기에 어떤 곳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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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정에서 2~3분쯤 걸어가자 1987년 세운 고청 서기 선생의 유허비와 1794년(정조 18년)에 중수된 '박약재'가 보였다. 이곳에서 문목공 고청 서기 선생은 1574년부터 1591년까지 유생들을 훈학하였다. 여러 고을에서 학문을 배우고자 찾는 이들이 많아지자 조금 떨어진 곳에 '공암정사'를 세웠는데, 이것이 공암서원을 거쳐 충현서원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공암서원이 세워진 이후에 서당 '연정'은 '박약재'라 불렸으며, 현재 '공주 박약재'는 이천서씨 문목공파 종중회에서 소유·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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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재' 외문에는 갑인 8월 7일 올린 상량문이 보였으며, 옆문이 별도로 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건물 내부는 살펴볼 수 없어 확인하지 못했으나, 숭정 3년 갑인 3월 성담 송환기 선생이 쓴 상량문( 1794, 정조 18)이 확인되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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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가 없고 문이 잠겨 있어 들어가지 못하고 담장 너머로 안쪽을 엿보았다. 원래는 초가였다 하나 현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기와에 팔작지붕인 '박약재'가 보였다. 뒤편으로 좀 더 돌아가 담장이 훼손된 곳을 통해 박약재의 측면과 후면도 엿볼 수 있었다. 시급한 정비가 필요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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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박약재' 뒤쪽의 둠배산 자락에는 고청 선생 유적 연못인 '연지(蓮池)'가 보였는데, 고청 선생이 1577년(선조 10년) 연꽃이 가득 핀 연못 뒤에 서당 세 칸을 지어 제자들을 가르쳤다 하니 '공주 박약재'의 기원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여 년 전까지는 박약재 주변에 넓은 못과 버드나무가 늘어서 있었고, 20여 년 전까지 이 연지에서 잡은 잉어를 봄, 가을의 제향에 올렸다고 전해진다. 암벽에는 연지 암각문이 새겨져 있는데, 공암서원의 중수를 주도한 박희성(朴希聲)의 아들 박고의 글씨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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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 앞섰지, 공부와 정보가 부족해 고청 선생이 공암리에 정착하기 전에 잠시 머물렀던 공주시 반포면 온천리 유지는 돌아보지 못하고 왔다. 고청 선생의 묘소와 계룡산 북쪽 진주봉 아래에 남아 있다는 거북골 암각문 등은 다음 탐방 때 둘러봐야 할 것 같다. 비단 고청 선생 유지를 둘러볼 목적이 아니더라도 꼭 한 번 다시 찾을 생각이다. 주변 경관이 수려하여 이 계절에도 산수화 속에서 활보하는 듯 착각에 빠져들게 했으니 꽃 피고 새우는 시절에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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