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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처절한 삶, 맺힌 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충남도 간부 공무원, '위안부 기림의 날' 앞두고 천안 국립망향의동산 참배

2019.08.13(화) 17:22:27 | pomjang (이메일주소:pomjang@naver.com
               	pomjang@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8월 14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아시나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국내외에 알리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기 위하여 지정한 국가기념일로서, 8월 14일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故) 김학순 할머니가 1991년 피해 사실을 최초로 공개 증언한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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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조 충남지사와 충남도 실국원장 등 간부 공무원들은 지난 13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고 피해자의 존엄성 회복을 위해 제정한 ‘기림의 날’을 앞두고 천안 국립망향의동산을 방문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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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부터 시행 중인 ‘충청남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념사업 지원에 관한 조례’에 근거, 그 일환으로 추진된 이날 참배에서 양승조 지사는 위령탑에 헌화·분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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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조 지사와 도 간부 공무원 등 30여 명이 함께 위령탑에 묵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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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조 지사는 "처절한 삶, 맺힌 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이겨내겠습니다"라고 방명록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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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추모비에 방문하여 헌화 및 추모가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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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망향의동산 장미묘역을 찾아 위안부 피해자의 넋을 기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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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양산 출신인 김복동 할머니는 14살에 일본군에 끌려가 22살에 돌아왔습니다. 김 할머니는 나라 안팎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해온 평화운동가였습니다. 2015년에는 분쟁지역 피해아동 지원과 평화 활동가 양성에 써달라며 평생 모은 돈 5000만원을 ‘나비기금’에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나비기금은 이 돈으로 ‘김복동 장학기금’을 만들었습니다. 김 할머니는 같은 해 국제언론단체가 선정한 ‘자유를 위해 싸우는 영웅’에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인 넬슨 만델라,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 등과 함께 이름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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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난 이기정 할머니는 1943년 무렵 일본 군인의 옷을 세탁하는 일이라는 말에 속아 싱가포르와 미얀마의 일본군 전용 위안소로 끌려갔습니다. 가족들도 모르게 이뤄진 일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생전 언론 인터뷰에서 “싫다고 하면 때리고 도망가면 죽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아파도 참아야지. 원망하고 울고 죽겠다고 생각도 하고 그랬다”라고 말했습니다.

해방이 되고서야 귀국한 이 할머니는 서울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등 어렵게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뒤늦게 고향으로 돌아간 이기정 할머니는 아버지에게만 ‘위안부’ 생활을 알렸습니다. 할머니는 뇌졸중을 앓아 오른손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나라에서 피해자를 보호해주는 줄도 모르고 지내던 이 할머니는 이 사실을 알게 된 가족의 신고로 2005년 뒤늦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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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상숙 할머니는 1928년 충청남도 서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예산에서 살던 1944년, 16살의 나이에 ‘공장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일본군 위안부 모집책의 말에 속아 경성(서울)과 평양, 신의주, 단둥, 톈진 등을 거쳐 중국 후베이성 우한 한커우의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갔습니다. 위안소에서 8개월 가까이 수용생활을 한 하 할머니는 이듬해 일본이 패전하면서 해방을 맞았지만, ‘일본군에게 수치를 당한 몸으로 고향 사람들을 볼 낯이 없다’는 이유로 귀국을 포기하고 중국인과 결혼했습니다. 아이를 낳을 수 없었던 하 할머니는 남편의 아이 셋을 친자식처럼 길렀고, 1994년 남편과 사별한 뒤에는 막내딸과 함께 지내왔습니다.
 
하 할머니는 해방 이후 중국에서 ‘조선’ 국적으로 남았으나, 분단 과정에서 중국 내 조선 국적이 모두 북한 국적으로 분류되는 탓에 1999년 한국 정부의 국적회복 판정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한국 국적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60년 가까이 살다 2003년 고향 땅을 처음 밟았습니다. 2000년 12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 국제법정’에 증인으로 참석하는 등 생전 ‘위안부’ 피해를 증언하는 활동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2013년 서울에서 열린 ‘제1회 세계 일본군위안부 기림일기념 국제심포지엄’에서는 “시집도 안 간 나이에 (위안소에) 들어왔어요. 일본이 이렇게 나쁜 짓을 하고 ‘그런 일이 없다’고 말하는데, 거짓말을 하면 되나요. 나는 (일본 정부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을 들어야지 안 그러면 내가 못 죽어요”라고 말하며 눈물로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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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망향의동산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54명이 안장돼 있습니다. 이제 남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20명입니다. 진정 어린 사과와 반성이 사라진 지금 상대에겐 지우고 싶은 과거사로만, 우리에겐 영원히 잊지 않아야 할 역사의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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