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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액운을 막고 안녕과 풍요를 비는 장승제

500여년 이어온 논산 주곡리 숫골 마을 장승제 봉행

2016.02.22(월) 16:45:22 | 계룡도령춘월 (이메일주소:mhdc@tistory.com
               	mhdc@tistory.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액운을막고안녕과풍요를비는장승제 1

충남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 숫골에는
1992년 논산시 향토문화유적 제2호로 지정된 장승제가 있습니다.

500여년을 이어 온 이름하여 주곡리 장승제인데
매년 음력 정월 14일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하여 지내는 마을 제사입니다
마을 주민 모두가 모여 금줄을 치고,
장승을 깎고, 세운 후 제사를 지내고
주민 모두의 이름을 적은 소지를 하며 복을 비는 행사인데
그래서인지 이 마을은 대대로 월남에 파병되었거나
군대에 가서 전사나 사고가 난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

숫골로 알려진 주곡리는 장승제와 백일헌 이삼 장군의 종택,
청주 양씨 시조 양기(楊起, ?~1394)를 중심으로
양치, 양희지, 양응춘, 양훤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충헌사가 있는 마을입니다.

그래서 마을 이름이 숫골 마을인데 숫[남]골이 왜 생겼냐고 물으니
훌륭한 분을 모신 사당이 있어 고개를 숙이고 다닌다는 의미의 숙골이라고
마을 어르신이 말씀하시더군요.

지역 사학자들은 이를 잘 연구하여 바른 지명으로 고쳐서 부르는 것은 어떨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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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헌로에서 주곡로로 들어서서 250미터 정도 들어서면 비로소 보이는 마을...
백일헌로에서는 마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답니다.

마을 전체가 마치 술 항아리같이 생긴 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어 주곡[酒谷]리가 아닌가 생각되고 있고,
그리고 지금은 사라졌지만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백일헌로는 호남 지방 사람들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다니던 주 도로라
크고 술맛 좋은 주막들이 있어 주곡리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는 곳입니다.
주변에 이몽룡이 과거에 급제하여 춘향이를 만나러 간 길이라 하여
춘향길이 이웃해 있기도 하고
가까운 노성 주변은 하도리 신원사 인근은 상도리로 불러왔으며
한양으로 향하는 주 도로였던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그 마을 입구에는 범상치 않은 고목의 좌우로
특이하게도 장승이 무더기로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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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곡리 장승은 마을의 실질적인 입구의 느티나무를 사이에 두고
좌우로 나뉜 길 왼쪽에는 남장승 '천하대장군축귀신[天下大將軍逐鬼神]'
오른쪽에는 여장승 '지하대장군축귀신[地下大將軍逐鬼神]'이라 쓰인 장승이 있습니다.

남 장승은 머리에 사모를 쓴채 눈을 부라리고 있으며
턱에는 묵선으로 긴 수염을 그려 놓았으며
장승 옆에는 솟대를 함께 세우는데,
이 마을에서는 솟대를 '짐대' 또는 '오릿대'라 부르고 있으며
주곡리에서는 장승과 솟대를 해마다 새로 깎아
묵은 것과 함께 세워두는 전통이 이어져
보통은 10 여기의 장승과 솟대가 한 묶음으로 세워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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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왼쪽의 남장승 아래는 장승샘이 있어
신성시 여기며 관리하고 있는데
장승제는 이곳에서 지낸다고 합니다. 

이 마을의 장승은 연산 4년(1498)에 청주 양씨 9세손 첨정공이 낙향하여
이 마을에 정착한 이후 주민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한 계책으로
마을 어귀에 온 주민이 신명을 다하여 장승을 깎아 세우고
마을 수호신으로 숭배하도록 하여 왔습니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왜군이 이 마을을 방에 습경을 하였는데요
마을 어구에 있는 장승을 사람으로 오인하고
총을 쏘아대지만 꿈적도 하지 않아 놀라 달아나다
다시 돌아와 자세히 살펴보니 사람이 아닌 장승임을 확인하고
마을로 진입하였으나
총소리를 들은 마을 사람들이 모두 다 달아나 숨어버려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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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선조 32년(1599) 임진왜란이 평정된 후
조정에서 문무백관들과 연회를 베푸는 자리에서
주곡리 장승 이야기가 회자되면서 선조가
"장승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하라"는 어명을 내렸고
이에 전국 각 지역의 마을 어구에 장승을 세우게 되었으며
마을 수호신으로 위하여 왔습니다.
그 시원이라 할 주곡리 장승제를
1995년 논산시 향토 유적으로 지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500여 년이 지나도록 매년 음력 정월 14일 날 오후 6시
마을 주민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정성을 다해 국태민안과 마을의 화평과 풍요를
개개인의 안녕과 행복을 비는 장승제를 지내오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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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오전 10시부터 장승 깎기가 시작된 주곡리 장승제는
정월 초삼일에 제비 마련을 위해
전통적으로 농악패가 집집마다 돌며 걸립[乞粒]을 하고
제관 선정을 통해 시작되는데
논산시 향토문화유적으로 지정되면서
논산시로부터 제비의 일부를 보조받고 있다고 합니다.

제관으로는 제주. 헌관. 축관 및 제의를 보조하는 좌 집사. 우 집사를 선정하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사를 별도로 두어
제물을 포함한 제반사항을 조관하게 했으나
근래에는 마을에 주민이 줄어 마을 회관에서 주민들이 공동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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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의 당일 주민들은 장승과 짐대를 만들 나무를 베어 준비하는데
장승목으로는 조선송만을 쓰며,
천하대장군(남장승)은 '우람하게 보이려고 배가 불룩 나온 놈'을
지하대장군(여장군)은
'배가 나오면 거만하고 드센 것처람 보이므로 다소곳하게 배가 들어가거나 반듯한 놈'을 선택하는데
짐대는 가늘며 길고 곧은 소나무를 장대로 하고,
오리 머리를 만들 기역(ㄱ) 자 모양의 나뭇가지도 함께 준비한답니다.

하지만 요즘 짐대를 만들 만큼 가늘고 긴 나무가 없어
나무 준비에 여간 힘든게 아니라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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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장승 깎기가 시작되면
마을 주민들이 돌아가며 껍질을 벗기고 옹이를 잘라내는 등
힘들여 일을 하는데 흥을 돋우기 위해
풍물패의 흥겨운 연주가 힘든 일을 잊게 해 줍니다.

중간중간 맑은 하늘에서 흰 눈이 내리던 이날
참석해 흥겨운 연주를 해 준 논산전통두레풍물보존회는
풍물대회에서 1위를 차지한 팀으로 그 실력이 가히 대한민국 최고라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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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잔치에 음식이 빠질 수 없으니
푸짐하게 잘 차려진 음식과 술을 나누며
주민과 참석자들의 소통과 화합을 이루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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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형태를 갖추어 가는 장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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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장승 조각의 세세한 부분까지
장승조각 전문가 양성직씨와
길상공방을 운영하며 충남 무형문화재 46호
김태길 목조각장의 정성으로 만들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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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은 먼저 낫으로
소나무의 흰 속살이 드러날 때까지 껍질을 말끔하게 벗겨내고
옹이 부분을 다듬은 후 붓으로 얼굴의 윤곽을 그린 다음
톱과 도끼를 이용해 형상을 조각하는데
머리와 얼굴 부위는 정과 끌, 망치 등을 이용해
보다 세밀하게 조각하고
명문을 쓸 배 부위는 명문을 쓸 수 있도록 편편하게 깎아 준비합니다. 

조각이 끝나면 먹으로 눈과 귀, 이빨, 사모관대의 문양을 그려주고,
배 위에 명문을 쓰면 마무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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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제일 이전에 제장과 장승샘을 깨끗이 청소하고
장승배기 일대 사방에 부정한 기운을 막기 위해
금줄을 둘러쳐 통행을 막았답니다.

하지만 자동차 통행이 워낙 잦아
도로 전체를 막기에는 문제가 많고
마을 주민의 숫자가 급격히 감소하면서 인원이 부족해
장승을 깍는 동안 연세가 많은 노인께서 새끼를 꼬고 있는 모습입니다.

새끼는 두 가닥의 볏짚을 양 손바닥으로 비벼서 꼬게 되는데,
오른손을 바깥쪽으로 왼손을 안쪽으로 끌어당겨서 꼬는 오른새끼가 일반적이고
그와 반대로 꼬는 왼새끼는 악귀를 쫓는 기능을 가졌다 하여
특별히 금줄을 칠 때 사용하는 새끼 꼬기 방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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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완성된 금줄[새끼]을 들고 한 팀은 금줄을 치러 갑니다.

금줄 아래에는 황토를 세 무더기 놓아
금줄 아래로 들어올지도 모를 부정한 것들을 막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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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줄을 치고 돌아오니 장승과 솟대가 완성되어 있습니다.

솟대 기둥이 너무 굵죠?

솟대인 짐대는 오리와 장대로 구성되는데,
장대는 가늘고 긴 나무의 껍질만 벗겨 그대로 사용하고
오리 머리는 기역(ㄱ)자 모양의 소나무 가지를 그대로 이용하여
껍질을 벗긴 후 한 쪽을 주둥이 형태로 납작하게 깎고
붓으로 눈과 깃털 모양을 그려주고 꽂으면 완성됩니다.

오리의 몸통이 되는 네모난 널판 조각은
앞위로 구멍을 뚫어 앞에는 오리 머리를, 뒤에는 장대를 꽂아 줍니다.
이 몸통에 오리 머리와 장대를 연결하면 짐대는 완성되는데,
이를 두고 주민들은  "짐대 위에 오리를 올려놓는다"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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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과 짐대를 깎아 완성한 후
마을 주민들이 풍물을 치며 장승의 완성을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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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과 짐대가 완성되면 농악패를 앞세우고 장승을 세우려 가게 되는데
예전에는 갓 결혼했거나 아들이 없는 집에서 장승을 메고 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 때문인데
장승을 멘 사람들은 전부 아들을 낳았다니 단지 속설만은 아닌 듯합니다.
^^

하지만 요즘은 젊은 사람이 없고 대부분이 노인들이라
장승을 메고 간다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아
이렇게 차에 싣고 앞자리에 풍물패를 앞세워 장승배기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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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일일이 땅을 파고 하나씩 장승을 심어 세웠는데
언제부터인가 장승배기에 도착하면
묵은 장승들 보다 앞자리에 새 장승을 세우고
넘어지지 않도록 잘 동여매 놓으면 됩니다.

묶을 때에는 남장승부터 매야 한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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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불룩한 것이 여간 거만해 보이지 않는 남장승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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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에 시작된 장승제는
오후 4시경 장승을 세우는 것으로 일단락되고
저녁식사 후 오후 6시부터 본격적인 장승제가 시작됩니다.

장승제 절차는 제물을 진설한 후 유교식 제례에 따라
분향 - 강신 - 초헌 - 독축 - 아현 - 종헌 - 소지올리기의 순으로 진행되며
소지는 마을의 대동 소지를 시작으로
각 집의 식구 모두의 소지를 올리는 것으로 끝을 맺는데
이전에는 유사가 유사 소지를 먼저 올리고
마을 전체의 가가호호 소지를 올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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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지 올리기가 끝나면
도로의 입구부터 매어 둔 금줄을 모두 풀어
장승의 몸통에 감아두고
제관은 제물의 일부를 떼어서 한지에 싼 후
남녀 장승의 몸통에 매달아 헌식하고
장승샘에는 별도로 생미역을 준비했다가 바치며
바가지에 장승샘의 물과 제물 일부를 섞어
마을 바깥을 향하여 뿌리며
'잡귀는 물러가고 부귀영화만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고 외치며
"해물리기"를 한다고 합니다.

모든 의례를 마치면 즉석에서 음복을 하고
풍물패를 중심으로 한바탕 신명나게 노는 것으로 장승제는 마무리가 된다고 하는데
계룡도령의 경우 이날 오전 10시부터 매달려 있어
다른 일을 하나도 보지 못해 부득이 장승 세우는 것을 끝으로 돌아와
장승제를 다 보지 못했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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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서도 보듯이 마을 주민들의 연세가 높아
앞으로 얼마나 더 장승제가 이어져 갈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썩 즐겁고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문화라는 생각으로 이 글을 씁니다.

박정희의 새마을 운동 이후 전근대적 미신 타파, 마을제의 경비 절감을 이유로
각 지역의 장승제와 장승이 급격히 소멸되었고,
이와 더불어 마을 공동체제의 약화, 외래 종교의 독선, 전래 풍습 멸시 의식 등이 확산되며
대부분 사라졌는데 마을공동체의 필요성과 민속 보존이라는 필요성에 따라
민속 문화재 보호령(1972. 4. 28)을 발표하고
"새마을 사업의 과잉 및 부작용으로 나타나고 있는 민속 문화재 파괴 행위는 엄금, 보호하라"는
특별 지시를 전국 시도에 시달하게 되었고
지금은 한국 장승 보존회 등이 조직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육 과정을 통해 장승꾼을 길러내고 있을 정도로 관심이 높아 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문화가 천년만년 이어져 우리의 문화와 삶이 영원하길 빌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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