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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뉴스

남편의 30년 꿈(한우 사육) 찾았다

농림축산식품부 주최

2013.11.05(화) 16:12:29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deun127@korea.kr
               	deun127@korea.kr)

남편의30년꿈한우사육찾았다 1

 남편의30년꿈한우사육찾았다 2
2013 귀농귀촌 창업박람회
귀농귀촌 수기 공모전 최우수작  


우리 부부는 건설회사에서 처음 만나 5년 연애 끝에 결혼을 했다. 아들과 딸을 낳아 20년을 사는 동안 우리 부부는 오랜 세월 작은 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남편이 학창시절부터 꿈꿔왔던 귀농을 해서 살기로 했다. 컨테이너로 집을 만들고 한우도 키우고 농사도 지어 몸에 좋은 먹거리를 즐기며 자연과 함께 살자는 대화를 했다. 재미있고 행복하게 살던 중 2010년 4월 남편이 23년 다니던 회사를 퇴직하게 되었다. 그 당시 아들은 고등학교 2학년, 딸은 중학교 2학년, 막막했다. 오래전부터 귀농을 꿈꿔왔고 대화를 해왔기에 안 된다는 거절 한마디 못하고 귀농을 결정하게 되었다.

귀농하기 위해 경기도의 토지 탐색에 나섰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땅값이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충남 예산에 남편의 고등학교 동창 친구 집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친구와 대화 중에 남편이 “나 회사 그만뒀다” 하니까 텔레파시라도 통한 걸까 기다렸다는 듯 “여기 내려와서 소나 키우지 그러냐?” 하는 친구 대답에 남편은 “응! 나 그거 하려구…”로 귀농은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친구는 토지를 알아봐주었고 2010년 11월에 토지를 계약했다. 계약을 하고나니 그 동안 부담이 되었는지 금연을 열심히 하던 남편은 그만 그 날로 담배를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는 슬픈 일이 발생….

우리는 구제역이 잠잠해진 2011년 마을로 합류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마을 이장을 만났다. 이장은 “젊은 사람이 온다하니 좋네. 축사만 아니면 뭐든 도와주겠네” 하셨다. 그동안 오로지 축사만 생각해 땅은 구입을 했고 축사 관련 준비만 해 왔는데 그 것만 아니면 된다니…. 그 이후의 말들은 들리지 않았다.

천천히 주민과 하나되기

드디어 2011년 5월 13일 포크레인 2대로 평작업을 시작했다. 축사 허가를 바로 해주지 못한다는 말에 처음에는 싸우고 행정소송을 해서라도 해야 하나 생각했었다. 그런데 우리 부부가 착각한 것이 있어 공사는 잠시 중단되었다. 수습하면서 내린 결론은 “천천히”라는 단어를 생각해 냈다.

농사의 ‘농’자도 모르니 살집을 마련하고 농사 공부도 하며 일단 마을 주민들과 친해지기로 했다. 남편은 이발도 하지 않고 모자도 쓰지 않고 피부를 검게 태우고 최대한 마을 주민화 되려고 노력했다. 또한 그 해 겨울 남편은 컨테이너 하우스에서 혼자 생활을 했다. 전기 판넬의 전기 값이 아까웠던 남편은 직접 만든 지게로 나무를 해오다 갈비뼈에 금이 갔다.

처음 계획은 남편이 먼저 터를 잡고 3년 후에 합류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마을 분위기를 보니 남자 혼자는 인정받기가 매우 힘들 것 같았다. 2012년 여름 주민등록을 옮기고 컨테이너도 화목 보일러로 바꾸어 겨울을 따뜻하게 살 수 있었다. 우리가 살아 본 결과 컨테이너하우스보다는 집을 작게 짓고 창고와 비닐하우스를 설치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고 싶다. 이때부터 마음을 내려놓고 비우는 연습과 돈의 노예는 되지 말자라는 신조가 생겼다.

우리를 도와주기라도 한 듯 2011년 6월 8일 마을에 경로잔치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장과 부녀회장을 만나 우리가 할 것들을 상의했더니 시루떡과 소주 두 상자. 그것으로 행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드디어 마을 분들 전체를 만날 수 있었고 떡은 마을 주민이 하는 곳에 부탁드렸다. 행사 당일 첫 만남이 매우 설랬다. 나는 “안녕하세요. 맨 꼭대기 새로 이사 온 사람입니다”하며 부침개를 비롯하여 음식도 도와 드리고 상차림, 설거지를 하며 마당의 쓰레기도 주웠다. 그리고 한분 한분의 특이사항을 뇌리에 입력하기 시작했다.

우리 부부는 마을을 다니며 언제든지 차 창문을 열고 뵙는 분들마다 인사를 했다. 그렇게 6개월 정도가 흐르고 우리 부부를 마을 주민으로 인정해 주었다. 그 해 연말에 마을모임(대동회)에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연초에 마을회의를 통해 “젊은 사람들이 축사밖에 생각 안했다는데 하지 말라고 하면 살지 말라는 소리지” 하시며, 축사 허가조건에 동의도 해주었다. 그 후 농업기술센터에서 진행하는 농업인대학 1년 과정(100시간 이수)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우리 부부는 매주 1회씩 강의를 들으며 인맥도 늘렸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드디어 2012년 가을 축사도 완공됐다. 송아지 입식을 하려는데 마을분의 정보로 송아지 입식자금 5,000만원(연1%)을 지원받았다. 우리 축사 ‘클라우 한우농장’에 송아지 23마리와 임신우 8마리를 입식했다. 현재 숫송아지 2마리와 어미소 5마리를 출하했다. 2013년 말까지 숫송아지 3마리가 출하 예정이며 올해는 특별사료자금 1,500만원(연1.5%)을 지원받았다.

어느덧 자리가 잡혀가고 아이들의 문제도 해결이 되어갔다. 아들은 대학 1학년을 마치고 군 입대를 했다. 딸은 시댁 어르신들과 함께 거주하며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 학업에 열중하고 있다. 아들이 휴가를 나와 시골집에서 오랜만에 가족(4명)이 모였다. 3년 전 귀농한다 했을 때의 느낌과 지금의 우리 부부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의 의미를 느꼈고 우리 가족의 삶에 폭풍우가 지나감을 느꼈다.

비록 아직도 집을 짓지 못하고 컨테이너하우스에 살고 있지만 귀농지인 이곳에서 해의 따뜻함과 달의 밝음과 하늘의 수많은 별 등 무심코 불렀던 동요들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어느새 비를 기다리고 있고 자그마한 한 알의 콩이 몇 배로 불어나는 자연의 신비에 대한 고마움을 느꼈으며 그런 자연과 함께하니 행복하다.

2013년 나는 귀농인들을 대상으로 상담하는 곳에 취업이 되었다. 또한 면사무소 소재지에 여성의용소방대에 가입했고 지역 주민들과 복지관에서 요가도 하며 귀농인모임에 참석하여 정보 교환을 하면서 즐겁고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

남편은 자금 회전을 위해 주택 리모델링 작업과 마을 일손을 도와가며 산소 이장하는 일, 벌초하는 일 가리지 않고 한다. 올해부터 3년간 마을 이장을 도와 총무 역할도 열심히 하고 면(面)복지관 자치위원에 가입도 했으며, 한우번식우모임도 참석한다. 마을작목반 일과 볏짚 비닐 레핑작업도 마을 주민과 하나 되기 위해 봉사하고 우리는 귀농을 잘했다며 살기 위해 열심히 노력 중이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은 있었다. 귀농은 남이 도와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살아야하나 연구하고 개발하고 제2의 인생은 금전의 가치를 떠나 마음을 내려놓고 비우며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이 진정으로 행복한가에 가치를 두어 귀농 정착은 성공했다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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