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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치말자 약속했던 친구 ‘동반 귀촌’

귀향해 예산에 둥지 튼 ‘여고시절’ 작사가 주영자씨

2013.07.08(월) 15:37:19 | 무한정보신문 (이메일주소:jsa7@yesm.kr
               	jsa7@yesm.kr)

처음 가는 시골집 찾기란 언제나 난제다. 이정표라는 게 대체로 무슨 나무이거나 축사 혹은 무슨색 대문 정도인데다 그 다음부터는 ‘쭈욱 올라와서…’라는 설명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6월 27일 ‘여고시절’ 작사가 주영자(61)씨가 예산군 응봉면 입침리에 터를 잡았다는 소식을 듣고 나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차례 집찾기에 실패하고 마을 어귀로 되짚어나와 다시 전화해 물으니 주씨가 뙤약볕 아래를 한참동안 걸어 마중을 나왔다.

주영자씨가 가장 좋아한다는 항아리들 앞에 앉아있다.

▲ 주영자씨가 가장 좋아한다는 항아리들 앞에 앉아있다.




‘어느날 여고시절 우연히 만난 사람…’으로 70년대 대한민국 여성들의 감성을 뒤흔들었던 작사가와의 대면은 그렇게 시골길에서 시작됐다.
짧은 퍼머머리, 민소매 티셔츠, 칠부바지의 꾸밈없는 차림에 선한 웃음이라니….

귀촌 혹은 귀향

충남 예산군 예산읍 예산리가 고향인 주씨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서울로 떠난 지 50여년 만인 지난해 4월 귀향했다. 건강이 좋지 않은 남편 때문에 시기가 당겨진 것일 뿐, 언젠가는 돌아올 생각이었다고 한다.
“친가와 외가가 모두 예산이어서 방학 때면 오곤 했는데, 예산역에 발을 디디면 마음이 그렇게 편안해 질 수가 없었어요”

지금은 한달에 일주일은 서울집에서 지내고 있지만, 언젠가는 완전히 정착해 계획했던 장류사업을 할 생각이라고 한다.
“농촌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민폐죠. 농사일 하시는 동네분들을 뵈면 너무 죄송해요. 저한테는 서울에 있을 때 하나 둘 모은 항아리들이 제일 큰 보물인데요, 쟤들 때문에라도 일해야 해요”

우연한 작사가의 길

한국음악 저작권협회와 작가협회 정회원으로 등록돼 있는 그는 ‘작사가’라는 직업이 아직도 쑥스럽고 민망하다고 한다.
“작사가는 작곡가나 가수가 발품팔고 다니며 홍보하면 앉아서 편히 수입을 얻는 것 같아요”
겸손한 말과는 달리 그가 쓴 노랫말은 ‘여고시절’ 외에도 친구(이용복), 행복할 수 있다면(김상희), 여고동창생(이미자), 그대 변치 않는다면(방주연), 처음 본 그대(나훈아), 느낌(최유나) 등 100여곡에 이른다.

그의 첫 작품이자, 최대 히트곡인 ‘여고시절’의 탄생비화가 흥미롭다.
“고 3때 ‘나의 노트’라는 공책이 있었는데 거기에 적어둔 글이었어요”
운명은 엉뚱한 곳에서 시작됐다. 가수지망생이었던 친구를 따라 작곡가 김영광씨의 사무실에 갔다가 공책을 놓고 왔던 것.
어느날 자신의 글이 인기가요가 돼 있었지만, 당시만 해도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크게 없던 때라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법대를 나온 직장상사가 나서 바로잡아 주지 않았다면 작사가 주영자는 영원히 묻힐 뻔 했다.
“그 때 유력일간지 사설에 관련 내용이 실리기도 했어요. 좀 떠들썩한 과정을 거쳤죠”
그렇게 시작한 작사가의 길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친구따라 예산으로 온 조영호(왼쪽)씨가 주영자씨와 사진을 찍고 있다. 여고시절 자세로.

▲ 친구따라 예산으로 온 조영호(왼쪽)씨가 주영자씨와 사진을 찍고 있다. 여고시절 자세로.



50년 우정이야기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그 가사 속 주인공 친구가 주씨와 함께 같은 마을로 귀촌했다는 것.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50년 우정을 이어오고 있는 조영호씨는 서울에서도 늘 주씨 동네로 이사했다.
“친구가 아니고 웬수죠. 너 가는데 나라고 왜 못가냐면서 이 동네에다 집을 짓더라구요”
말과는 달리 그 긴 세월 동안 다툼 한 번 없었을 정도로 잘 맞는 두 사람의 성격은 정반대라고 한다.
“저는 내성적인데, 영호는 굉장히 활달해서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어요. 여고시절 가사도 이 친구 이야기를 듣고 쓴거예요”
평생 살면서 딱 한사람의 친구만 있으면 외롭지 않다더니 두사람의 우정이 실증해 준다.

“영자는 정말 욕심이 없어요. 성격이 어찌나 좋은지 처녀 때 다녔던 직장 사람들 모임을 30년 넘게 하고 있다니까요”
주씨의 전화벨이 울렸다. ‘어느날 여고시절…’이다. 지금도 노래방에 가면 ‘여고시절’을 같이 꼭 부른다는 여고동창생 둘이 마주보고 활짝 웃는다. 두 사람은 어느새 여고생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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