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의 셋째 아들 이면 공의 죽음, 그리고 모든 순국 선현들께 대한 감사
▲ 이면 공 안내 표지판
▲ 묘소가 멀찍이 보입니다
▲ 한적한 곳에 조용히 자리잡고 있는 이면 공 묘소
▲ 무덤 앞 오른쪽의 비석
▲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충무공의 애 끊는 마음을 적은 비문 앞면
▲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충무공의 애 끊는 마음을 적은 비문 앞면
계단을 따라 묘소로 올라가 보았습니다. 당시에 결혼을 안했으므로 홀로 묘소가 있고 옆에는 ‘충무공 셋째 아들 이면의 무덤’이라고 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또한 비문 뒤와 옆에는 아들의 죽음을 안 충무공이 난중일기에 그 슬픔을 적은 내용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제가 찾은 이면 공에 대한 난중일기의 자세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일부는 비문에도 적혀 있습니다)
“10월14일, 맑음. 새벽 2시쯤 꿈을 꾸니,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를 가다가 말이 실족해서 면이 전사한 것을 마음 속으로 알고 간담이 떨려 목놓아 통곡했다. (중략)
저녁에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에서 온 편지를 전하는데, 떼어보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움직이고 정신이 황난하다.
겉봉을 대강 뜯고 둘째 아들 열의 글씨를 보니, 겉에 통곡(慟哭)이라는 두 글자가 써 있다.
하늘이 이다지도 어질지 못한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만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올바른 이치인데..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이것은 이치가 잘못된 것이다.
천지가 어둡고 저 태양이 빛을 잃는구나! 슬프다, 내 어린 자식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특한 기상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는데..
하늘이 너를 머물게 하지 않는가? 내가 죄를 지어서 그 화가 네 몸에까지 미친 것이냐?
이제 내가 세상에 있은들 장차 무엇을 의지한단 말이냐?
차라리 죽어서 지하에 너를 따라가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리라.
네 형과 내 누이와 너의 어머니도 또한 의지할 곳이 없으니..
아직 목숨은 남아있어도 이는 마음은 죽고 형용만 남아 있을 뿐이다. 오직 통곡할 뿐이로다.
--- 난중일기중
▲ 이면 공의 묘소를 참배하는 가족
이면 공의 묘소에서 잠시 고개 숙여 묵념으로 참배를 한 뒤 조금 둘러 보는 동안에 청소년 자녀 둘을 데리고 온 부부가 있었습니다. 아빠가 이면 공에 대해 설명을 해주자 아이들도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참 자상한 아빠와 역사의 현장을 제대로 보고 듣는 아이들이었습니다. 보기 좋았습니다.
이순신장군께서 당시 아드님을 잃은 사실을 통보 받은 11월15일날, 그동안 계속해서 기록해 오던 난중일기조차 쓰시지 않으셨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겠습니까. 얼마나...
어쩌면 왜군들은 충무공에게 연전연패 하면서 그 복수를 당신의 아들에게 한것 같아 어버이로써 더 미안했던 감정이 생겼는지도 모릅니다.
또한 이면 공은 노략질을 하러 마을로 들이닥친 왜군을 맞아 전혀 물러서지 않고 당당히 맞서싸우다 전사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왜군은 이면 공의 맨살을 뜯어냈다고 합니다.
▲ 이면 공 묘소 바로 아래 왼쪽에 자리잡고 있는 생가
참배를 마치고 내려가면서 오른쪽을 보니 이면 공이 살았던 충무공의 생가가 보입니다. 다시 마음이 숙연해 집니다.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 어버이의 보호조차 받지 못한 상태에서 너무 이른 나이에 왜군에게 목숨을 빼앗겼으니...
▲ 행복한 평화를 맛보는 시민들
참배를 마치고 돌아 가다 보니 현충사에 마련된 연못의 비단잉어들에게 먹이를 주며 행복한 주말 한때를 보내는 많은 시민들이 보였습니다. 이 행복한 평화, 누가 주었을까요?
충무공의 셋째 아드님 이면 공과 같은 경우처럼, 우리 민족사에는 가정을 돌볼 겨를조차 없이 나라를 구하고자 목숨을 걸고 싸운 선현들과, 그 사이 자녀든 아내든 목숨을 잃은 분들 덕분입니다.
호국 보훈의 달이 가기 전, 그래서 다시금 선열들과 그 유가족분들께 숙엄한 감사의 추념을 올려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