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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치열한 삶의 흔적, 홍주의병 발자취를 따라

충남의 재발견 ⑮ 홍성 홍주의사총

2013.06.17(월) 17:11:21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deun127@korea.kr
               	deun127@korea.kr)

불의와 억압에 대한 대규모 항거
사람답게 사는 세상에 대한 절규
홍주의병 유해 홍성에 남아



천지가 뜨겁게 달궈지는 6월의 한복판, 홍주의병의 넋을 기린 ‘홍주의사총’의 자리가 무상(無常)으로 가득하다. 한때 자신 삶의 언저리를 지키기 위해 절규한 이름 모를 의병의 외침도 아침 이슬처럼 사라지고 무심한 자동차 소리만 적막함을 흔들고 있다.

호국보훈(護國報勳)의 달을 맞아 이곳을 찾았으나 오가는 이 없이 쓸쓸했다. 의사총이 개방되지 않는 월요일에 찾은 탓도 있겠으나, 매서운 더위도 한몫 했을 터. 의사총 입구에 마련된 광장의 넉넉한 공간은 이곳의 고독을 더욱 깊게 했다. 그나마 광장 한 구석 넝쿨로 마련된 그늘 밑에서 인생을 논하던 두 노인이 위로가 됐다. 광장 전체에 뙤약볕이 작렬했다. 그늘의 유혹을 뿌리치고 의사총으로 향했다.

광장에 들어서면 의사총을 알리는 안내판이 눈에 들어온다. 당시 의병이 일제에 항거하는 전투 장면을 기록한 삽화가 인상적이다. 낫과 칼, 도끼 등을 들은 의병이 총·칼로 무장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다. 조양문을 배경으로 펼쳐진 가옥들이 불타고 있다. 아수라장이다.

홍주의사총의 창의문

▲ 홍주의사총의 창의문



결과는 뻔하다. 삽화 속 의병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밤이 지새도록 돌아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는 이들의 심정을 떠올려 보니 애타는 마음이다. 무엇을 위해 저리도 산화한 것일까?

의사총 너머로 나무와 풀이 무성했다. 찾는 이 없는 이곳에 나뭇가지 사이를 흔들며 불어오는 바람은 조문객이었다.

홍주의병 묘소 ‘홍주의사총’

‘홍주의사총’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당시 일본군에 대항하다 순국한 의병들의 유해가 합장된 묘소다. 당시 전 이조참판 민종식은 1906년 3월 의병을 모아 일본군이 주둔한 서천과 보령 남포 등을 습격한 후 홍주성을 점령했다. 하지만 막강한 일본군의 화력 앞에 홍주성은 함락됐고 수백 명의 의병들은 순절했다.

의병의 유해는 일제강점기 동안 홍성천변과 남산부근에 방치됐다. 이후 1949년 현재의 ‘홍주의사총’ 자리에서 많은 유골이 발견됐고 지금의 자리에 합장하게 됐다. 이곳은 사적 제431호로 지정됐고 매년 5월 30일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의사총은 소박하지만 정숙하게 조성됐다. 입구에서 의사총에 다다르는 길 한가운데는 태극모양이 빛바랜 관문이 우둑하니 서 있다. 창의문(倡義門)이다. 의병을 일으킨 문이란 뜻이다. 홀연히 서 있는 창의문을 지나면 낮은 구릉 위의 의사총이 바로 보인다. 사람의 발길이 없는 의병들의 무덤은 을씨년스럽다. 의사총 옆에 서 있는 병오순난의병장사공묘비(丙午殉亂義兵將士公墓碑)만이 외로움을 달랜다. 묘비에는 당시 전투에 대한 내용이 기록됐다.

의사총과 묘비를 보고 있자니 안쓰러움이 밀려든다. ‘죽음은 하나의 개별적 사건’이라고 한 소설가 김훈의 말이 문득 떠오른다. 이들의 죽음은 호국과 애국의 이름으로는 빛나는 역사지만, 개별적으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자의 외로운 죽음이며 잊힌 역사다. 누가 오열하는 마음으로 이들을 찾을 수 있겠는가. 이름 모를 이들의 오래된 죽음은 오늘의 생을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교훈으로 남을 뿐, 개별적 죽음은 슬픔으로 읽히지 않는다. 호국지사(護國志士)의 명예를 얻은 이들의 죽음은 누군가에게 애달픈 이별이고, 어떤 이에는 절망이리라. 그래서 이들의 죽음은 호국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거대하고 벅차다.

어쩌면 이들이 죽음을 맞는 순간 떠올린 것은 ‘낮잠 자는 일상’,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밥상’, ‘일한 만큼 먹고 사는 세상’ 따위의 소소함이 아닐까? 의병이 그토록 꿈꾸던 세상이 소소한 일상의 허락이었다면, 나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다.

의사총에서 벗어나 오른편 담벼락을 타고 200여m 걸어 올랐다. 작은 언덕에 홍주의병 기념탑에 다다른다. 기념탑은 지난 2월 28일 준공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홍주의병 인물상이다. 帥(수)자가 새겨진 깃발을 들고 장총과 칼로 무장한 당시 의병들이 진격하는 모습을 조각했다. 모두 입을 꾹 다물고 있어 결연함이 엿보인다. 세상이 변한 지금, 도대체 이들은 어디로 진격하는 것일까?

치열한 전투벌인 남포읍성과
최후 격전지 홍주성


남포읍성은 초라하지만 홍주의병이 승전을 거둔 의미 있는 장소다. 보령 외곽 한적한 시골 마을의 한 자락에 있다. 조선 시대부터 관아가 자리한 곳이지만, 나무가 고목이 되고 물줄기가 다시 굽어지는 세월의 풍파를 겪은 지금 시골 마을의 한 풍경으로 남겨졌다.

성곽은 새카맣고 큼직한 돌덩이들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 졌다. 철없는 연인의 고백처럼 영원할 것 같았던 과거의 위세는 사라지고 거친 들풀만 돌무더기 위로 무성히 자라있었다. 돌무더기에 손을 짚고 무심한 마음으로 바라보자니, 아직도 그때의 함성이 맺혀 있는 듯했다. 차가운 기운이 온몸에 전해진다. 성벽 틈새에 쌓인 세월의 퀴퀴한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당시 승리의 함성은 어디로 갔을까. 산도 헐고 하늘도 바뀌고, 땅도 변했다.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도 훗날 그러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득해져 가눌 길이 없다.

처절한 전투지였던 이곳은 현재 작은 초등학교가 자리 잡았다. 역사의 한구석에 미래를 향한 아이들의 함성이 이질적이었지만, 정겨웠다.

남포읍성을 떠나 홍주성 격전지인 홍성으로 향했다. 남포 전투에서 승리한 의병은 1906년 5월 19일 홍주성을 공격·점령했다. 그러나 보병 2개 중대와 기병 반개 소대, 전주수비대 1개 소대로 구성된 일본군의 파상공격에 31일 결국 패퇴하고 만다. 홍주성은 조선 시대 성곽으로 둘레가 약 800m로 사적 제231호로 지정됐다.

현재 홍주성 성곽은 깔끔하게 복원됐다. 돌담길을 따라 걸으면 기분도 상쾌해진다. 홍주성의 정문인 조양문(朝陽門)도 천 년 도시인 홍성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홍주성과 조양문을 돌다 보니 온몸에 땀이 흥건했다. 돌담길 그늘에 잠시 몸을 기댄다. 간간이 부는 바람이 반갑다. 해 질 녘 홍주성의 풍경은 과거의 흔적과 오늘의 분주함으로 가득했다.
/박재현 gaemi2@korea.kr

치열한삶의흔적홍주의병발자취를따라 1

▲ 홍주의병기념탑에 재현된 홍주의병 인물동상.

 

홍주의병이란
 
홍주의병은 홍주군(현 충남 홍성군) 일대에서 반일의병항쟁을 한 민병을 뜻한다. 의병항쟁은 1895~1896년과 1906년 2차례에 걸쳐 전개됐다. 제1차 항쟁은 일제에 의해 세워진 친일 내각의 갑오변란과 명성황후시해사건, 단발령 등에 반발한 것이다. 이후 홍주 일대 유생들은 1895년 11월 28일 화성 강변에서 향회를 열고 군사 활동을 결의했다. 하지만 당시 관찰사인 이승우의 배반으로 1차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어 전 참판 민종식을 중심으로 한 2차 의병이 일어났다. 민종식은 자신의 농경지 10여 두락을 팔아 군자금을 제공하는 등 항쟁의 기치를 높였다. 2차 홍주의병은 비인과 남포읍성 등 서천과 보령 일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그 후 광천을 거쳐 결성으로 진군, 5월 19일 홍주에 입성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홍주성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지만, 결국 일본군의 화력 앞에 순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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