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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총독 신년회견때 대전이전 전격 발표

충남도청 이전(2) - 대다수 충남 도민 편익 이유 들어

2012.10.07(일) 15:05:54 | (이메일주소:all@korea.kr
               	all@korea.kr)

2012년 10월 1일. 한가위 연휴였던 이날 충남도청에는 특별한 일 없이 당직자들만이 휴일근무에 열중했다. 그러나 80년 전으로 되돌아가면, 바로 이날 도청 앞마당에서는 의미 있는 한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공주에서 대전으로의 충남도청 이전이 완료돼 열리는 개청식(開廳式) 행사였다. 물론 공주읍민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대대적인 이청식(移廳式) 행사를 따로 열기는 했지만 공식적으로 도청의 대전 시대를 알리는 행사였던 것이다. 이젠 역사의 기억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대전시민의 날' 행사를 통해 이날을 기억했건만 이젠 그마저도 열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기억해주는 이 없는 이날에도 도청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묵묵히 중앙로를 내려다보며 그 자리를 꿋꿋하게 지키고 있었다.

충남도청 정문에서 바라본 중앙로 모습.

▲충남도청 정문에서 바라본 중앙로 모습.



충남도청을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기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은 이미 박중양(朴重陽, 창씨명 朴忠重陽) 제1대 충남도장관 시절 제기되어 충남을 떠들썩하게 한 바 있다.

박중양은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뼛속까지 일본인이 되고자 했던 신념적 친일파 중 한 사람이다.1906년에는 대구 군수로 있으면서 대구읍성의 해체를 주관했고 1908년 경상북도 관찰사, 1910년 충청남도 관찰사를 지냈다. 그해 한일병탄이 있었고 관제가 개편될 때 충청남도 장관(도지사)으로 계속 유임되었다. 이후 종5위 훈5등(從五位 勳五等)의 품계를 받았는데, 1912년 3월 31일까지 충청남도 장관직을 지냈다.

박중양 1대 도장관 제기이후 10년 넘도록 진전없어

당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양아들이란 소리까지 들었을 정도의 세력가가 도청의 대전이전을 건의하는 건의서를 총독부에 제출했으니 도청이전은 곧 구체화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도장관이 바뀌면서 10여년이 넘도록 도청이전에 대한 구체적인 진전이 없어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나는 듯 했다. 하지만 그 때 이미 대전은 경부선 철도와 호남선 철도의 개통으로 신흥도시로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어 예비 도청소재지로써의 입지를 차근차근 다지고 있었다.
 

 

제1대 충남도장관인 친일파 박중양의 모습

▲제1대 충남도장관인 친일파 박중양의 모습
 

그러던 중 1926년 7월 대전에 도시계획위원회가 발족되고 다음해 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가 조선총독으로 부임해 오면서 본격적으로 다시 도청이전 문제가 거론됐다.

대전의 일본인 유력자들은 대전을 상업도시로 발전시키고 충남도청의 유치를 통해 행정도시로서 변모를 꾀하고자 했다. 충남대 대학원 국사학과 김나아의 석사논문에 따르면, 대전의 자산가이자 토건업자인 스즈키 겐지로(須須木權次郞) 등 대전의 유력자들이 총독부 출입이 잦은 경성부협의원들을 통해 총독의 촉탁비서를 소개받아 뇌물을 주고 충남도청의 대전 이전을 로비하였다고 한다. 총독에게 준 정치자금 10만원 이외에도 비서 등에게 현금 4만5000원을 뇌물로 주는 등 거액의 로비자금을 사용했다.

1927년 야마나시 조선 총독 부임이후 본격적으로 거론

이러한 사전 정지작업이 있은 후 야마나시 총독은 1929년 3월 충남도 시찰을 명목으로 대전을 방문했다. 유성 온천장에서 벌어진 연회에서 대전의 일인(日人) 거류민을 대표하는 시라이시 데츠지로(白石鐵二郞)로부터 도청이전에 대한 건의를 받았다.

변평섭의 저서 <충남반세기>에 따르면 시라이시는 이 자리에서 대전은 이미 교통의 중심지로 발돋움했고 대전-여수간 철도건설 계획이 서있는 등 향후 발전 가능성이 있다면서 도청의 대전이전 당위성을 설명했다고 한다. 게다가 이케가미 시로 정무총감도 "조선의 남부 중원이 텅 비어있어 대전에 도청을 두어야만 균형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며 "지금까지 대전에 도청이 오지 않은 것은 늦은 감이 있다"고 거들었다는 것이다.

시라이시는 일본의 귀족원 출신으로 정계에서도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하녀와의 스캔들 때문에 도피하듯 일본을 떠나 그의 하녀와 함께 대전에서 과수원을 경영하고 있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들은 야마나시 총독은 신석린 충남지사, 이케가미 총감, 김갑순(金甲淳, 창씨명 金井甲淳) 중추원 참의, 시라이시 등 5명을 자기 숙소로 불러 도청이전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김갑순은 대전에 있던 자신의 개인 토지를 도청 부지로 내놓겠다고 확약했다.
 

 

 

1920년대 대전역의 기관차 모습. 경부선과 호남선 철도가 가설되면서 대전은 급격하게 발전했다.<사진출처 : 충청남도 개도 100년사>

▲1920년대 대전역의 기관차 모습. 경부선과 호남선 철도가 가설되면서 대전은 급격하게 발전했다.<사진출처 : 충청남도 개도 100년사>


땅투기 귀재 김갑순 도청부지 내놓아
 
여기서 잠깐 김갑순에 대해 얘기해 보자. 정운현의 저서 <친일파는 살아있다>를 보면 김갑순은 공주사람으로 당대에 발복하여 엄청난 재산을 모은 부자다. 한 때 그는 서울에 갈 때 절반은 남의 땅을, 절반은 자기 땅을 밟고 다녔다고 할 정도로 조선 제일의 땅부자였다. 공주감영의 관노였던 그는 연줄로 경찰이 되고, 이를 발판으로 공직에 발을 들여 돈을 벌었다. 봉세관(현재의 세무공무원)과 6개 군의 군수를 지내면서 세금을 횡령하고 개발정보를 사전에 입수해 투기를 했다고 한다. 특히 초창기 봉세관 시절 역둔토에서 나오는 세금을 착복해 축재했다고 한다.

그의 재산이 껑충 뛴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대전지역 땅 투기였다. 1904년 이후 대전에 철도가 건설되고 관공서가 들어서자 이곳을 눈여겨 보던 김갑순은 호남선 가설계획을 미리 입수해 일찍부터 대전에 집중적으로 땅을 사들였다. 그런 그가 충남도청의 부지를 선뜻 내놓기로 한 것은 도청 이전 후의 개발 이익을 노린 때문이었다. 도청이 대전으로 이전되면서 평당 1~2전 정도를 주고 산 그의 땅이 하루아침에 1만배인 100원 이상으로 뛰었던 것을 보면 그야말로 그는 땅 투기꾼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1930년대 대전 시가지 전경이다. 대전역에서부터 도청까지 중앙로가 일직선으로 나있음을 볼 수 있다. 대전역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발달해 있다. <사진출처 : 충청남도 개도 100년사>

▲1930년대 대전 시가지 전경이다. 대전역에서부터 도청까지 중앙로가 일직선으로 나있음을 볼 수 있다. 대전역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발달해 있다. <사진출처 : 충청남도 개도 100년사>


 
어쨌든 이들은 다음해 예산편성 때 도청이전에 필요한 경비를 계상하여 신청하도록 하는 한편, 이 문제는 일체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총독이 적극적으로 대전의 건의를 수용하는 자세를 보여 도청이전 문제는 순조롭게 진행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30년 그해 8월 야마나시가 뇌물사건으로 물러나고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총독으로 부임해 오면서 도청이전 문제가 잠시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대전에서는 효율적인 도청 유치 활동을 위해 11월 '도청이전대전기성회'를 조직했다. 시라이시를 회장으로, 회덕군수와 대전군수를 지낸 김창수(金昌洙) 등을 부회장으로 뽑았다. 대다수가 일본인으로 구성되었지만 대전과 충남의 조선인들을 의식해 특별히 김창수를 부회장으로 뽑은 것이다.

뇌물총독의 이전 결정 논란불구 계속 추진   

이들은 곧바로 사이토 총독과 이마무라 다케시(今村武志) 내무국장을 만났지만 이전에 대해서는 확답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총독부의 이전계획은 암암리에 진행되고 있었다. 1931년도 새해 예산안이 편성되면서 충남도청 이전비용으로 35만9000원이 책정됐다. 이에 대해 총독부 내부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이전을 결정한 전임총독이 뇌물 사건에 연루돼 실각한 만큼 이전을 연기하자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이와는 별도로 경제사정의 어려움에 따른 긴축정책을 위해 이전을 미루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사이토의 생각은 달랐다고 한다. 변평섭의 저서 <충남반세기>에 따르면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총독의 권위가 지켜져야 한다. 비록 전임 총독이 이 문제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많은 잡음을 냈고 또 총독부의 재정형편이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전임 총독의 결정을 그 어떠한 이유 때문에 취소하거나 변경한다면 총독의 권위는 땅에 떨어진다. 따라서 총독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라도 충남도청의 이전계획은 변경될 수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김나아의 논문 <일제하 충남도청의 대전 이전과 지역사회의 동향>에 따르면 1931년 1월 11일 총독부 이마무라 내무국장은 비밀리에 시라이시 대전기성회장을 서울로 오도록 연락했고 유진순 충남도지사, 미야시게 카이치(宮重嘉一) 충청남도 지방과장과 함께 자신의 관사에서 만났다. 이 자리에서 내무국장은 도청의 대전 이전을 위해 공주에 4만엔을 조달하여 구제할 수 있는지, 도청부지 1만평을 기부할 수 있는지, 도청직원 200여 세대의 주택을 준비할 수 있는지, 물가인상을 방지할 수 있는지, 토지나 건물 매매가격을 도청이전 전의 시가에 따를 수 있는지 등을 물어보았다고 한다.

이는 도청이전의 성패를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들이었는데, 80년이 지난 지금 도청이전의 성패를 가늠할 잣대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면 시사하는 바 적지 않다. 어쨌든 총독부의 이같은 조치는 이미 충남도청의 이전이 기정사실화 됐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공주 구제 ·도청직원 주택 준비· 물가인상 방지 등도 검토

드디어 1931년 새해가 밝았다. 1월 13일, 사이토는 총독부 회의실에서 신년기자회견을 가졌다. 새해 시책방향과 총독부의 각종 방침을 설명한 사이토는 이 자리에서 폭탄선언 하듯 충남도청의 이전을 공식 발표했다. 공주에 있는 도청을 대전으로 이전하기 위해 예산을 책정했으며 제국의회가 열리면 의안으로 상정시켜 결정을 얻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고다마 히데오 정무총감은 당일 성명서를 내고 "대전은 경부 호남의 양 철도의 분기점으로 이 양선과 경남철도를 이용하면 거진 도내를 일순할 수 있으며 물화의 집산, 금융 경제의 발달, 기타로 보아 장래 도내의 경제상 중심지 될 소지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으므로 행정의 중심을 대전에 옮기어 도민 대다수의 편익을 얻도록 하고자 하는 바"라고 도청이전의 이유를 보충 설명했다. 반면 "공주는 한번 큰 비가 오면 교통이 두절되어 전연 고립상태에 빠지기를 잘 하므로 경제, 교통은 물론행정상 지장이 적지 않다"고 덧붙였다.

  

1920년대 공주 공산성 앞에 있던 금강목교의 모습. 공주사람들은 서울이나 대전으로 갈때 이 목교를 건너다녔고 홍수가 나면 고립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이 목교는 충남도청을 대전으로 옮기는 대가로 금강철교가 가설된 후 해체되었다.<사진출처 : 충청남도 개도 100년사>

▲1920년대 공주 공산성 앞에 있던 금강목교의 모습. 공주사람들은 서울이나 대전으로 갈때 이 목교를 건너다녔고 홍수가 나면 고립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이 목교는 충남도청을 대전으로 옮기는 대가로 금강철교가 가설된 후 해체되었다.<사진출처 : 충청남도 개도 100년사>



향토사학자이자 충남도청에서 54년간 근무했던 김영한(金英漢·88)씨는 "실제 장마가 지면 공주는 3~4일간 교통이 두절되는 불편함이 있었다"면서 "총독부는 교통불편 등을 도청이전 구실로 삼았지만 사실 이는 핑계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장마나 혹은 교통 불편의 문제는 후에 금강대교 건설로 해결됐기 때문이다.

어쨌든 충남도청의 이전 뉴스는 신문지면을 통해 널리 알려졌고 당시 대전에서 발행되던 호남일보(湖南日報)는 이를 머리기사로 다루었다. 이 발표가 나자 대전은 거리마다 희망과 활기가 넘쳐흘렀다. 김갑순과 시라이시 등이 중심이 되어 시급하게 대전토지주식회사(大田土地株式會社)를 설립해 도청 부지를 확보하는 한편, 뒤따라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해 올 각급 기관의 부지를 마련하고 알선하는 일을 벌여나갈 계획을 세웠다. 당장 목척교(木尺橋)의 확장공사가 이뤄졌고 대전역으로부터 도청이 들어설 신청사간의 도록폭도 종전보다 배로 늘려 직선도로로 완성시켰다. 게다가 그 해 4월 대전은 지방제도 개정에 따라 면(面)에서 읍(邑)으로 승격되는 경사까지 겹쳤다.
<우희창 미디어센터장>
 
<참고자료>
김나아 '일제하 충남도청의 대전 이전과 지역사회의 동향' 충남대 대학원 석사논문. 2011년
변평섭 '실록 충남반세기' 1983년
정내수 '대전의 도시발전' <대전 100년사> 2002년
정운현 '친일파는 살아있다' 2012년
지수걸 '도청의 설립과 이전' <충청남도지> 2010년
지수걸 '일제하 공주지역 유지집단의 도청이전 반대운동' 1996년
충청남도 '도정사료소장품목록' 1997년
충청남도역사문화원 '충청남도역사박물관'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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