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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윤봉길 의사 혼이 깃든 충의사

2012.09.01(토) 16:02:03 | 예산군청 (이메일주소:hmi929@korea.kr
               	hmi929@korea.kr)

충의사.

▲충의사.


독도문제의 국제사법재판소 제소, 한국과의 외교라인 단절 등 일본의 도를 넘는 독도 영유권 주장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일제 강점기 당시 나라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고 희생했던 독립 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재조명 되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예산군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매헌 윤봉길 의사. 그의 고향인 예산군 덕산면에 조성된 ‘충의사’에는 그의 자취와 애국혼이 서려있다.
 
충의사는 지난 1968년 성역화 사업으로 조성된 후 1972년 사적 제229호(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로 지정되었으며 약147,072㎡규모이며 윤봉길 의사의 영정이 봉안된 사당, 유품을 전시하고 최첨단기법인 영상복합모형으로 세계적인 전시연출로 역사의 산교육장인 기념관, 생가인 광현당, 성장가인 저한당(4세 이후부터 중국 망명이전까지 살았던 곳)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념관 내에는 보물 제568호로 지정된 윤봉길 의사의 유품 27종 51점이 전시되어 있으며 국내외를 통해 매년 15만 여 명의 방문객이 찾아 윤봉길 의사의 애국 혼을 체험하고 있다.
 
명칭 또한 일제 강점기 당시 윤봉길 의사의 구국의지를 엿볼 수 있는데 광현당이 있는 ‘도중도’는 ‘조선반도 속의 섬’이란 뜻으로 일제가 절대 침범할 수 없는 곳을 의미한다. 또한 저한당은 건저낼 저(狙), 한나라 한(韓)을 써서 일제 치하로부터 나라를 건져낸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윤봉길 의사는 1908년 예산군 덕산면에서 태어나 14세 때부터 유학자인 매곡 성주록 선생의 문하에서 유학을 정진하고 청년시절에는 야학을 열어 문맹퇴치운동을 시작으로 각곡독서회와 목계구매조합을 조직하여 농민운동을 시작하고 야학과 농촌운동 교재로 농민독본 3권을 지어 유인본으로 펴냈으며 농촌구제와 농촌진흥을 위해 월진회를 조직하는 등 농촌운동가로 활동했다.

그러나 계몽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중국으로 망명해 김구 선생의 한인애국단에 입단한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열린 일왕천장절기념 상해사변전승기념식에 의탄을 투척하여 침략군 사령관 시라가와 대장 등 침략수괴에게 천주(天誅)를 내리고 같은 해 12월 19일 25세의 일기로 순국했다.
 
여기서 한 가지 눈길을 끄는 대목은 의거 당시 도시락폭탄을 던진 것으로 알고 있으나 실제로 투척한 것은 물통폭탄이었다는 것. 당시 윤봉길 의사는 각각 도시락과 물통으로 위장된 폭탄을 갖고 있었고 도시락 폭탄은 의거 후 자결용이었다.
 
윤봉길 의사의 유해가 우리나라에 안장된 것은 해방되고 1년 후인 1946년으로 광복회 회장이었던 이강훈 선생이 일본으로 건너가 윤봉길 의사의 유해를 모셔와 서울 효창공원에서 국민장으로 안장했다.
 
한편 이러한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침체된 국내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당시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청년이 해냈다”고 극찬하며 중국 내 한인독립운동과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보도되어 우리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렸을 뿐 아니라 당시 각국 열강의 식민치하에 놓여있던 나라들의 구국 의지를 밝히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충의사는 매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 의거를 기념하는 ‘윤봉길문화축제’를 개최하고 있으며 해마다 국내는 물론 일본과 중국 등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참석해 윤봉길 의사를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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