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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살신성인 농삿꾼 아버지 사랑합니다

동생들을 위한 희생으로 고단한 삶 자처

2012.05.25(금) 17:25:17 | 이영희 (이메일주소:dkfmqktlek@hanmail.net
               	dkfmqktlek@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인생이란 뭘까요?  앞으로 일주일 후면 친정아버지가 칠순을 맞으십니다. 시집 가서 출가 외인인 저는 뼈 마디 저린 손으로 저희 남매를 구김없이 잘 자랄수 있도록 충청남도 예산에서 평생 농사만 지으며 살아오신 아버지를 생각만 하면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농사짓느라 힘드셨을걸 생각해 마음이 아프기도 하지만 저의 가슴을 저리게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정말 우리에게 ‘가족’과 ‘인생’이 뭔가 하는 이유 때문입니다.

거기다 ‘팔자’라는것 까지도요.

저희 아버지는 4남매의 맏이로 태어나셨습니다. 7살 때부터 겨울철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 톱과 낫을 들고 산에 오르셨다고 하니 그때의 생활상이 짐작이 갑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고등학교에 들어가야 할 나이가 되셨던 16살때 아버지의 아버지셨던 할아버지가 몸져 누우시면서 졸지에 집안의 농삿일과 모든 일을 떠맡게 되셨습니다. 그게 아버지와 저희 자식들의 인생을 슬프게 만든 시작이었습니다.
 

살신성인농삿꾼아버지사랑합니다 1

▲ 시골에서 농사짓던 아버지. 맨 오른쪽이 저희 친정 아버지이십니다. 이때는 동네 어르신들과 농삿일 하던중에 냇가에서 막걸리 한잔 하시는 시간이었다는군요. 

 

아버지 밑에는 동생이 3명 있었죠.  지금의 작은 아버지 두분과 고모 한분이 그분들입니다. 그런데 큰아들이었던 아버지는 동생들을 위해 그야말로 살신성인을 자처하셨답니다.

 “나는 머리가 나쁘닝께... 머리 좋은 늬덜이 공부 잘 혀서 대학 가라”
 
아버지는 동생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씀 하시고는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셨습니다.  그러나 저희 아버지는 머리가 나쁘신분이 아니셨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중학교때 반에서 1, 2등을 하셨다고 하더군요. 더 기막힌건 그 중학교 3학년때 담임선생님이 아버지를 고등학교에 보내야 한다며 할아버지한테 3번이나 찾아왔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난한 농촌에서 모두 다 상급학교에 갈 처지가 못된다는걸 아시고는 당신의 동생들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 스스로 진학을 포기하신겁니다. 말도 안되는 ‘머리 나쁘다는 핑계’를 대면서....
 
결국 작은 아버지와 고모는 모두 다 대학까지 다녔습니다. 저희 아버지요? 중졸에 농삿꾼이 됐구요. 평생 예산에서 땅을 일구며 농촌에서 계셨답니다.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며 시골에서 결혼을 하시고 남동생과 저를 낳으셨고 저희들 역시 시골에서 땅 따먹기, 제기차기, 수박서리 같은거 하면서 완전 촌놈으로 자랐죠.
 
그 와중에 큰형(저의 아버지)이 뼈빠지게 번 돈으로 명문 대학을 졸업한 뒤 좋은 대기업에 취직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작은 아버지들과 고모는 도시에 아파트를 사고 검정색 고급 승용차 타면서 조카들 낳고 떵떵거리며 살았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어린 우리는 철없던 시절이니 그런거 저런거 모르며 지냈답니다.
 
어쩌다가 할아버지 할머니 제사때나 명절때 큰댁인 우리집에 작은 아버지 두분과 조카들이 놀러와서 도시 아이들 티 내며 “미국 갔다 왔네”“영국 가서 연수하고 돌아왔네”하는 말들을 할때마다 그냥 촌놈인 우리와는 사는게 약간 다르구나 정도만 생각했죠.
 
그후 간신히 전문대학 들어가서 철이 들고 머리가 커진 나는 앞뒤 내용을 전해 듣고는 점차 엄청난 희생만 자처하신 아버지가 한없이 미웠고, 그 아버지 때문에 나와 동생도 결국 요모양밖에 안되었다는 생각에 너무 슬퍼서 집을 나와버리고 싶기까지 했습니다.
 
아버지 앞에서 “왜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셨어요?”라며 대들기까지 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화가 나는 이유는 단지 나와 내 동생이 풍요로운 가정의 보살핌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작은 아버지와 고모는 형님인 우리 아버지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좋은 대학 가고 잘 살게 되었다는거, 고향 사람들은 다 아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우리 집에 너무나 무관심합니다. 동생들 가르치시느라 농사지으면서 지은 농가 부채는 내가 시집갈때쯤에는 4000만원이 넘었습니다. 그 빚,  작은아버지들은 무관심한채 결국 우리 모두 대학 졸업한 뒤 더 이상 큰 돈 들어갈것 없다고 생각하신 아버지가 그동안 농사를 짓던 땅떼기를 팔아서 간신히 갚았습니다.
 
작은아버지는 언젠가 설날 연휴때 차례 지내러도 안오고 발리로 휴가를 떠난적도 있답니다. 그래도 바보 같은 아버지는 “작은 아버지가 바쁘신게여”라며 우리를 달랬습니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픕니다.
 
이제 그나마 제가 바라는게 있다면, 작은아버지나 고모가 저희 아버지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게 아닙니다. 그저, 내 아버지가 지난 날의 힘들었던것 다 잊고 편하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다는거 하나 뿐입니다. 저는 효도할거구요. 그게 인생인듯 합니다. 팔자라는거죠.
 
아버지, 사랑합니다. 영원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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