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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조선시대

  • 맹사성의 모습

    맹사성 (孟思誠, 1360~1438)

    맹사성은 여말선초 청백리로서, 고려 문신 맹희도의 맏아들이자 무신 최영의 손녀사위다. 맹도희는 어릴 적 권근 문하에 나아가 수학했다. 한 가지를 들으면 열 가지를 알아내 일문지십(一聞知十)이라 불렸다. 17세에 진사 초시와 복시에서 장원을 하였고, 국자감(國子監) 구재(九齋)에 들어가 문과시험을 준비하였다. 당시 국자감은 학제가 혼란하고 부정부패가 심했지만 1986년 27세의 나이로 문과 친시(親試)에서 장원급제해 춘추관(春秋館) 검열(檢閱)에 올랐다. 1408년에는 한성부윤 및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을 거쳐 사헌부대사헌이 되었다. 1412년 풍해도도관찰사(豊海道都觀察使)에 임명되었을 때, 영의정 하륜(河崙)이 그가 음악에 밝은 줄을 알고 서울에 머물러 악공(樂工)을 가르치도록 아뢰었다. 맹사성은 노부 병간호를 위해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호조판서가 되어 다시 사직을 청하자 왕은 충청도관찰사로 삼아 노부를 봉양케 하였다. 1427년 우의정에 올라『태종실록(太宗實錄)』감관사(監館事)가 되었다. 이때 그는 세종이 실록을 한 번 보고자 하는 뜻을 내비치자, 왕이 실록을 보고 고치면 반드시 후세에…사관(史官)이 두려워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반대하였다.

    맹사성의 저서는 주로 관찬이다. 다만 그가 76세에 관직을 버리고 온양(고향)으로 낙향해 지은 향가,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와 한시, 연자루(燕子樓)가 널리 애송되어 전해졌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연시조(聯詩調)로, 이황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과 이이의 고산구곡가(高山九曲圖)에 영향을 준 유가(儒家)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선구로 평가받고 있다. 태평성대 안분지족하는 사대부의 유유자적한 삶과, 강호에 은둔하면서도 임금을 향한 충의를 잊지 않는 유학자의 정신을 그렸다.

    맹사성은 명문세도가 출신이고 높은 관직에 올랐음에도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다. 그의 검소한 행실에 대해서는 여러 일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1432년 황상(병조판서)이 맹사성의 집에 방문해 그의 남루한 집을 보고 돌아와 행낭채를 부순『야사총서(野史叢書)』의 기록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맹사성은 또한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서울을 오고 갈 때 시종을 단 한 명만 대동하고 간편한 차림을 하여 관복을 입지 않았으며, 역마를 이용하지 않아 사람들이 그가 재상인 줄 몰랐다. 특히 그는 당시 사대부들이 즐겨 타던 말 대신 소를 즐겨 타 그의 집 인근에 살았던 성석림(영의정)은 그의 집 앞을 지날 때마다 말에서 내려 걸었다고 전한다. 맹사성이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영남에 사는 부자와 공당문답(公堂問答)한 일화는 그의 청렴한 기상과 성품을 잘 보여주는 일화다.

  • 장영실의 모습

    장영실 (蔣英實, 미상)

    장영실은 ‘15세기 동아시아의 가장 뛰어난 기계 기술자’로 수많은 과학기기를 발명·제작해 우리나라 과학기술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그의 발명과 제작은 세계사적으로도 선진적인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자격루는 장영실의 업적 가운데 가장 훌륭한 업적으로 꼽힌다. 이는 장영실이 1434년에 세종의 명을 받아 김빈과 함께 중국 및 아라비아의 자동물시계를 비교 연구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시보장치다. 자격루를 발명·제작한 공로로 그는 관직이 대호군에까지 올랐다.

    장영실은 천문학 분야에도 뛰어난 족적을 남겼다. 1432년 세종의 명으로 천문 및 기상의기 제작이 시작되자, 당시 중추원사(中樞院使), 이천을 도와 간의대 제작에 착수하고 천문의기 제작을 감독하였다. 이 공로 때문인지 1433년 1년이 채 안되어 5품 상의원에서 4품 호군으로 특급 승진하였다. 또한 같은 해 혼천의(渾天儀) 제작에 착수하여 이듬해에 완성하였다. 혼천의는 선기옥형(璇璣玉衡) 또는 혼의(渾儀)라고 불리는 일종의 측각기로, 적도좌표를 관측하고 천체위치를 측정하는 데 사용되던 의기이다. 그는 혼천의를 제작하기 위해 1421년 세종의 명을 받고 윤사웅 등과 함께 명에 건너가 그 구조와 성능을 시찰하고 돌아왔으며, 모든 기술을 총동원해 제작하였다. 혼천의는 이로써 오늘날 중국의 기술적인 영향과 우리나라의 과학적인 전통이 결합된 기기로 평가받는다. 장영실의 혼천의는 1432년에 시작된 여러 천문의기 제작 사업 가운데 가장 먼저 완성된 의기(儀器)였으며, 이후 간의(簡儀) 등 다른 의기의 모태가 되었다.

    장영실은 이후에도 혁혁한 발명을 하였다. 먼저 1441년 세계 최초의 우랑계인 측우기와 수표를 발명하였다. 또 천체관측기구인 대간의(大簡儀)와 소천의(小踐儀)를 비롯, 태양의 고도와 출몰을 측정하는 규표(圭表)를 제작해 경복궁(景福宮) 간의대(簡儀臺)를 세계 최고의 천문관측시설로 만들었다. 그뿐 아니라 휴대용 해시계인 편주일구(懸珠日晷)와 천평일구(天平日晷), 표준 해시계인 정남일구(定南日晷) 등 여러 해시계와 자격루의 일종인 흠경각(欽敬閣) 옥루(玉漏) 등 물시계를 제작하였다. 이 밖에도 당시 사용되던 동활자, 경자자(庚子字)의 결함을 발견하고 이를 보완해 금속활자인 갑인자(甲寅字)를 주조하였다. 경상도 채방별감(採訪別監)이 되어서는 도내 철 채광 및 제련에도 관여하였다.

  • 양성지의 모습

    양성지 (梁誠之, 1414~1482)

    양성지는 세종대부터 성조대까지 6조 관직을 역임한 문신이다. 문교(文敎)와 경륜(經綸)이 당세와 후세에 거울이 될 만해 세조로부터 해동의 제갈량(諸葛亮)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양성지는 우리 역사와 문화를 보호하고 숭상하는 일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중국 요순 황제만 이상적인 군주로 여겨지던 시대에 단군을 국조로 모실 것을 주장하고, 중국 역사서만 교과서로 사용되던 시절에 동국사를 배울 것을 건의하였다. 또한 중국 풍속만 숭상되던 시대에 우리나라 고유 풍속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매년 봄(3월 3일) 가을(9월 9일) 사격대회를 열고 고구려의 유속을 본받아 무풍을 장려할 것을 제안하였다.

    양성지는 문신이었지만 군비에도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다. 숭문경무 풍조가 만연하던 시대에 문묘 외에 무묘를 따로 건립해 역대 명장을 모실 것을 제안하고, 문관과 무관을 동등하게 대우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군호의 중요성을 피력하고, 군사를 뽑을 때 시험을 치러 우수한 군사를 모집할 것과, 병역의 토대가 되는 호적제도를 정비할 것을 건의하였다. 나아가 군정 10책을 역설하고 비변 10책을 제시해 국방의 근본 방침을 상술하였다. 또한 나라의 근본은 백성이고, 정치의 근본은 민생이라고 말하며 민생 안정에 노력하였다. 이에 백성의 과업인 농사 일에 큰 관심을 기울여 포구를 막아 농토를 넓히고, 수리시설을 갖춰 농토를 보호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각 도, 군, 현에 의료기관을 설치해 백성의 복리를 증진하는 데 힘썼다. 지방의 크기에 따라 의원의 수를 정하고, 전의감에서 의술을 연구하게 한 뒤 지역민을 돌보게 하였다. 또 감사로 하여금 성적을 매겨 상벌을 줄 것을 건의하였다.

    나아가 백정에게 양민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노역을 균등하게 부담할 것을 제안하는 등 진보적인 사회정책안을 제시하였다. 또한 문물과 예악 제도를 정비하는 데도 공을 기울였다. 과거시험 과목을 현실에 적합하게 개정하고, 우리 전통 음악인 아악을 보호하며, 우리나라 악부와 중국 악부 외에 번악부를 따로 설치해 일본악과 여진악을 아울러 채용할 것을 권하였다. 아울러 서적십이사상소문을 저술해 도서의 보존 및 간행에 실효를 기하였다.

    그는 국사 뿐만 아니라, 1463년에 정척의 업적을 이어받아 한국 최초의 실측지도인 동국지도를 완성하였다. 1478년에는 세종실록지리지의 결점을 보완해 팔도지리지를 완성하고, 팔도주군도, 팔도산천도, 팔도각일도, 양계도 등을 붙여 완전한 형태의 지리지 체계를 구비하였다. 이는 오늘날 조선 초기 지리서의 결산인 동국여지승람을 능가하는 학문적 가치를 지녔다는 평가를 받는다.

  • 성삼문의 모습

    성삼문 (成三問, 1417~1456)

    성삼문은 조선 초기 집현전 학자와 사육 충신으로 이름을 떨친 학자이자 정치가이다. 1447(세종 29)년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세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아 수찬(修撰), 직집현전(直集賢殿)에 올랐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정인지(鄭麟趾), 최항(崔恒),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이개(李塏) 등과 함께 도왔고, 신숙주와 명을 여러 번 왕래해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만나 음운(音韻)을 질문하였다. 또한 사신을 따라 명에 건나가 음운 및 교장(敎場) 제도를 연구해 1446년 훈민정음이 반포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성삼문은 시에도 뛰어났는데, 중국 사신 예겸(倪謙)과의 일화가 유명하다.

    한편, 1453년 수양대군(훗날 세조)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재상 김종서(金宗瑞)와 황보인(皇甫仁)을 죽이고, 단종의 왕위를 넘보자 단종 복위 계획을 치밀하게 세워 집권에 반대하였다. 먼저 단종에게 정기적으로 신하를 접견해 공식 활동을 재개하라고 권하고, 수양대군의 거사를 궁중에서 내밀하게 돕고 있던 환관 엄자치(嚴自治)와 전균(田畇)의 탄핵 상소를 제기하였다. 성삼문은 1455년 세조 즉위 이후 공신에 봉해졌지만 끝끝내 사양하고, 아버지 성승(成勝)의 지시에 따라 박중림(朴仲林), 박팽년(朴彭年), 유응부(兪應孚), 허조(許慥) 등과 함께 단종 복위 계획을 세워 세조를 제거할 기회를 엿보았다.

    1456년 6월 1일 명나라 사신 접대연을 거사일로 정하고, 운검(雲劒)을 휘둘러 세조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으나 당일 아침 연회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운검 시립이 금지되자 거사가 중지되었다. 당시 그와 함께 거사를 도모한 김질(金礩)이 장인 정창손(鄭昌孫)과 함께 밀고해 체포되고 단종복위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다리가 타고 팔이 잘리는 모진 악형을 당하면서도 세조의 불의와 신숙주의 불충을 크게 꾸짖으며 인두가 식었으니 더 달궈 오라고 호통친 일화는 그의 절의를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다. 1691년(숙종17)에 신원되어 1758(영조34)년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1791(정조15)년 단종충신어정배식록(端宗忠臣御定配食錄)에 올랐다.

  • 이순신의 모습

    이순신 (李舜臣, 충무(忠武), 1545~1598)

    1545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외가가 있는 아산으로 이주하여 성장하고 혼인 1576년(선조 9) 식년무과(式年武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처음 관직에 나갔으며 1583년(선조 16)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ㆍ훈련원 참군(訓鍊院參軍)을 지내고 1586년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를 거쳐 조산보 만호(造山堡萬戶) 때는 호인(胡人)의 침입을 막지 못한 데 대해 정죄(定罪)하려 하자 그 원인이 첨병(添兵)을 거절한 데 있다 하여 자기의 정당성을 끝내 주장하다 중형은 면했으나 백의종군(白衣從軍)의 길에 올랐다. 1589년(선조 22) 선전관ㆍ정읍 현감(井邑縣監) 등 미관말직(微官末職)만 을 지내다가 91년(선조 24)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절충장군(折衝將軍)ㆍ진도군수 등을 지내고 같은 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에 승진, 좌수영(左水營:麗水)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 힘썼다. 임진왜란 중에 각종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며 승전보를 전하던 중 1597년 원균(元均)의 모함으로 서울에 압송되어 사형을 받게 되었으나 우의정 정탁(鄭琢)의 변호로 도원수 권율(權慄)의 막하에서 두 번째 백의종군을 하였다. 왜군이 다시 침입하여,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원균이 참패하자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되어,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鳴梁)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 31척을 부수었 다. 다음해 고금도(古今島)로 진을 옮겨 철수하는 적선 500여 척이 노량(露梁)에 집결하자 명나라 제독 진인(陳璘)의 수군과 연합작전을 펴, 적군을 기습하여 혼전(混戰)중 유탄에 맞아 54세의 일기로 전사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玉浦)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사천(泗川)에서 거북선을 처음 사용하여 적선 13척을 분쇄한 것을 비롯하여 당포(唐浦), 당항포(唐項浦)에서도 승리하였으며, 한산도(閑山島)에서 적선 70척을 무찔러 한산대첩(閑山大捷)의 큰 무공을 세웠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내원(來援)하자 죽도(竹島)에 진을 옮기고, 장문포(長門浦)에서 왜군을 격파, 적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적을 막아 왜군의 작전에 큰 타격을 가하였고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훈련을 강화하고 군비확충ㆍ난민구제ㆍ산업장려 등에 힘썼다. 임진왜란 중에 이순신 장군의 고안으로 세계 최초의 돌격용 철갑전선(鐵甲戰船)인 거북선을 만들기도 하였다. 투철한 조국애와 뛰어난 전략으로 민족을 왜적으로부터 방어하고 또한 격퇴시켰던 명장이었다.

  • 안견의 모습

    안견 (현동자(玄洞子)·주경(朱耕), ?~?)

    안견은 조선초기 세종부터 세조때까지 활동한 화가이다. 그는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을 가까이 섬겼으며 그의 의뢰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그린 화가로 유명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조선초기부터 중기까지 그의 화풍을 이어받은 화가들이 대부분일 정도로 조선화단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산수화에 특히 뛰어났고 초상화·사군자·의장도 등에도 능했으며, 그의 화풍은 일본에까지 전해져 무로마치 막부 시기의 수묵화 발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현재 그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그림은 몇 점 있으나, 정확히 그의 그림으로 확정된 것은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가 유일하다.

    안견의 그림으로 추정되는 그림은 여럿이 있지만, 안견이 그렸다고 확실시되는 그림으로 현전하는 것은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가 유일하다. 이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기초로 그려졌다. 안견은 안평대군의 후견으로 안평대군이 소장한 중국그림을 많이 보고 공부하여 자신의 화풍을 만들었다. 안견은 중국 북송(北宋) 때의 대표적 화가였던 곽희(郭熙)의 화풍을 토대로 하고 그밖의 여러 가지 다른 화풍을 수용하여 자기 나름의 독특한 양식을 이룩하였다. [몽유도원도]는 안견의 이러한 화풍을 확연히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1447년 안평대군은 꿈에 박팽년과 더불어 복숭아밭에서 노닌 황홀한 꿈을 꾸고 안견에게 이를 이야기해주면서 그림을 의뢰하였다. 이 꿈 이야기는 도연명의 [도화원기]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는데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들은 안견은 3일 만에 [몽유도원도]를 완성하였다. 몽유도원도란 꿈에 복숭아밭에서 논 이야기를 그렸다는 뜻이다.

    1619년(광해군 11)에 기록한 서산의 지방지 《호산록》에 안견의 출신지가 서산군 지곡면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현재 서산에 안견기념관이 있고 안견의 작품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일본 덴리대학중앙도서관 소장)를 실측 크기로 제작한 영인본과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던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적벽도(赤壁圖)》 등 총 18점의 작품이 향토 작가들의 미술품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담당부서 : 정책기획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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