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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활약했던 황신을 모신 부여의 창강서원

2020.02.03(월) 17:42:22지민이의 식객(chdspeed@daum.net)

갑작스러운 성공은 각고의 노력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진짜 성공의 진리를 망각하게 만든다. 그런 성공에 운이 얼마나 크게 작용했는지는 미처 생각하지 않은 채 다시 또 그만큼의 돈이나 관심을 획득해 똑같은 황홀함을 느껴보려고 같은 시도를 계속 반복한다. 이런 일을 가장 많이 겪는 사람들이 도박꾼이기는 하지만 높은 자리에 올라갔던 사람도 그런 경향이 있다. 사람이라면 추락은 언제나 괴로운 것은 사실이다.
 

 

 
창강서원에 현존하는 건물로는 제사 지내는 사당과 배움의 공간인 강당,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남아 있는데 이곳으로 옮겨진 것은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1966년에 지금 있는 자리로 이전·복원한 것이다.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사숙(思叔), 호는 추포(秋浦)인 황신이라는 사람은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이 전화위복으로 작용한 사람이기도 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에는 정철(鄭澈)의 일당이라 하여 파직당했다가 임란이 일어난 해에 다시 기용되어 활동을 하게 된다. 
 

 
부여의 한적한 곳에 자리한 창강서원은 조선의 조정에서 사액을 받은 사액서원으로 황신을 모시기 위해 만들어진 서원이다. 황신의 묘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저석리 창강서원(滄江書院)의 뒤에 자리하고 있다.
 

 


1605년(선조 38) 임진왜란 때의 공을 인정받아 호성 선무원종공신(扈聖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고 1612년(광해군 4)에는 임진왜란 때 세자인 광해군(光海君)을 모신 공으로 위성공신(衛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회원부원군(檜原府院君)에 봉해지기도 했지만 광해군과 정치적으로 대척 관계에 있던 영창대군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인 사건인 계축옥사 때 유배된다.
  

 
계축옥사 때 당시 영의정 이덕형(李德馨)과 좌의정 이항복(李恒福)을 비롯한 서인·남인들은 유배 또는 관직을 삭탈당하고 쫓겨나는데, 선조로부터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을 잘 보살펴달라는 유명을 받은 신흠(申欽)·박동량(朴東亮)·한준겸(韓浚謙) 등 7대신 및 이정구(李廷龜)·김상용(金尙容)·황신(黃愼) 등도 포함이 된다. 
 

 


1613년(광해군 5) 일어난 계축옥사 때 옹진에 유배되어 1617년(광해군 9) 세상을 떠났는데, 그는 1629년(인조 7) 문민(文敏) 시호를 받고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창강서원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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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 수정일 : 202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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