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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움, 공주 공산성의 매력에 반하다

역사 속으로 떠나는 공주 공산성 탐방,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진 여행

2023.08.31(목) 17:52:04포토안세상(photoanworld@outlook.kr)

한 걸음 한 걸음, 성벽을 따라 걷는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가며 고요한 바람이 어깨를 스치고 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마치 한편의 수련 같다. 공주시의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이 살아 숨 쉬는 곳, 공산성이다. 이곳은 단순한 경치뿐만이 아니라 백제의 역사와 숨결을 함께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백제의 왕들과 귀인들의 발자취가 여기에 남아있으며, 그 시대를 되새기며 천천히 걸어본다면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지는 감동이 솟아오를 것이다.

공산성은 웅진 백제 시기(475~538년)를 대표하는 왕성으로 백제의 대표적인 고대 성곽이다. 
성의 길이는 총 2,660m(토성 735m, 석성 1,925m)이고 동서남북 네 곳에서 문 터가 확인되었는데,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가 남아있었고, 1993년에 동문과 서문을 복원하여 각각 영동루와 금서루로 명명하였다.
비단결 금강이 감싸 흐르는 고풍스러운 성곽을 따라 걷다 보면 1500년 전 고대 왕국 대백제의 찬란했던 향취가 가슴속 깊이 다가온다.

공산성은 백제시대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감영을 비롯해 중군영 등 중요한 시설이 있었다. 현재 성내에는 추정왕궁지를 비롯해 백제시대 임류각지, 연지와 통일신라시대의 건물터, 그리고 조선시대 유적인 쌍수정, 영은사, 쌍수정사적비, 만하루, 명국삼장비 등 많은 유적이 남아있다.

특히 2011년 10월에는 백제의 옻칠가죽찰갑옷을 비롯해 마갑과 화살촉, 철제 무기류 등이 출토되었는데, 갑옷에 645년 이라는 글씨가 남아있어, 갑옷의 제작 및 사용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공산성은 백제 시대에는 웅진성으로, 고려시대에는 공주 산성, 조선시대 인조 이후에는 쌍수 산성으로 불렸다. 이 성은 금강에 접한해발 110m의 산에 능선과 계곡을 둘러쌓은 포곡형 산성으로 축조되었는데, 백제시대에는 토성이었다가 조선시대 인조, 선조 이후에 석성으로 개축하였다. 현재는 동쪽의 735m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석성이다. (공산성 안내 책자 발췌)
 
▲ 무령대왕(공산성 앞 교차로에 세워진 무령대왕의 모습)

2021년 9월에 설립되어 약 20억원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무령왕은 백제 제25대 왕으로 대내외적인 안정을 바탕으로 521년 양나라에 보낸 국서에 "고구려를 여러 번 격파하여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선언.
웅진 백제의 가장 훌륭한 임금이었고 공주를 백제 왕도로 위상을 높인 임금이다. 이 동상은 특이한 점이 회전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서쪽을 바라볼 때는 그곳에 무령왕릉이 있고, 북쪽을 바라볼 때는 고구려를 여러 번 격파하고, 갱위강국을 선포한 대왕의 위엄이 서려 있으며, 남쪽을 바라볼 때는 백성들을 따뜻하게 보살피는 군주의 의미를 담고 있다.

무령대왕 홀로
▲ 무령대왕(우측에서 바라본 모습)

공산성 앞
▲ 무령대왕 바로 반대편에는 공산성 앞 공주 관문을 통과하면 바로 공산성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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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역사유적지구는 대한민국 중·서부에 있는 백제의 왕도와 밀접하게 연관된 유적으로, 주변국들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하여 문화적 발전이 절정에 이른 백제 후기(475~660)를 대표하는 유산이다. 백제는 기원전 18년 부터 기원후 660년까지 약 700년간 이어진 한국의 고대 왕국 중 하나이다. 

공주의 백제역사유적지구는 공산성이, 무령왕릉과 왕릉원이 대표적이고, 부여의 백제역사유적지구는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나성 정림사지, 능산리고분군이며 익산의 백제역사유적지구는 왕궁리유적, 미륵사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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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공주의 공산성과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을 비롯한 부여, 익산의 백제유적 8곳이 '벡제역사 유적지구'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중국과의 교류를 기초로 백제의 독창적인 문화를 이룩하고, 이를 일본 등 주변국가에 전하여 고대 동아시아 문화번영에 기여한 점이 높게 평가되어 세계인의 유산이 되었다. 특히 공주 공산성은 백제 웅진도읍기(475~538년)의 왕성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 받았다. 성벽 축조에 사용된 판축기법(고운흙과 모래흙을 번갈아 다져서 쌓는 방법)과 벽주건물지(도량을 파 기둥을 촘촘하게 세운 후 고운흙으로 벽을 갈라 만든 건물지)는 고대 중국 및 일본과의 문화교류를 통한 백제 토목건축 기술의 발전과 전파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공주시청 홈페이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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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민천교 '영세비', 목사 김효성의 비 등의 비문을 볼 수 있다.

▷제민천교 '영세비'(공주 향토문화유적 기념물 제20호)
1817년 (순조 17년) 제민천이 대홍수로 범람하고 제민천교가 붕괴되자 이를 재 건립한 사실을 기리는 비석이다. 비문에는 1817년 여름 홍수로 다리와 둑이 무너지자, 다리의 복구를 8월에 마치고 한천의 둑을 고쳐쌓은 일은 이듬해인 1818연 4월에 모두 완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사업 자금의 조달방법 및 그 과정에서 공이 있는 관리와 자금을 지원한 강신환 등 10여명의 일반백성 이름도 적혀있다.(비문 옆 자료 발췌)

▷목사 김효성의 비(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목사 김효성의 비는 백성을 바르고 어질게 다스린 공주 목사 김효성(1585~1651)을 기리기 위해 1828년(순조28년)에 세운 비이다. 김효성은 1613년(광해군5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1615년(광해군7년)에 인목대비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길주와 진도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관직을 되찾았으며,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두루 지냈다. 1644년(인조22년) 공주 목사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었으며,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이름을 떨쳤다. 목사 김효성의 비를 처음 옥룡동에 세울 때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 몸돌,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하는데, 공산성 서문 안쪽으로 옮기면서 거북 모양의 받침돌이 사라져 사각형 받침돌로 대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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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성 '금서루'

금서루는 공산성 4개 성문 가운데 서쪽 문루이다. 성 안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지만 1895년에 편찬된 공산지의 문헌기록과 지형적 여건 등을 고려하여 1993년에 복원하였다. 현재의 문루는 본래 서문이 있던 자리에서 약간 남쪽으로 이동하여 지은 것이다. 금서루는 비록 새롭게 복원된 것이지만 조선시대 성문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문루: 문 위에 세운 높은 건물.
▷공산지: 1895년(철종10년)에 편찬된 충청도 공주목(지금의 공주시)의 읍지(한 고을의 역사와 문화, 풍속 등을 기록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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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금서루를 중심으로 길게 늘어선 성벽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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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을 지나 뒤돌아보면 바로 공주시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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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서루를 뒤로 하고 내려오면 길게 늘어선 길과 왼쪽 오른쪽 왕궁관련 유적지 뒤로는 역사 체험장, 정면에는 멀리 공북루가 보인다.
금세 내리던 비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치고, 마음은 평온하고 조용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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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북루 좌측에 있고 바로 앞에는 금강이 흐르고 있다. 계절이 변해도 그 자리에 남아있을 것만 같은 그 모습은 우리의 인생과도 닮아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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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다가와 바라본 나무의 모습에서 강렬한 감성을 담은 나무 한그루는 오랫동안 공주와 금강을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이 큰 존재는 마음을 안정시키고 위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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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금강을 끼고 굽이굽이 놓여진 성벽길은 백제의 역사와 숨결을 함께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성벽을 걷는 여정이 끝나면, 백제의 숨결을 깊이 느끼며 공주시의 아름다움을 떠나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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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북루 위에 한 마리 까치가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마치 시간의 흐름을 멈추고 머물며, 이곳의 평온한 분위기에 조화를 이루는 듯 하다. 그 순간 자연, 역사가 어우런진 그림 같은 순간을 나누며 세상의 소리와 마음의 소리가 조용히 어우러지는 특별한 순간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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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북루 내부에 붙어있는 글과 시가 잘 어우러져 있지만 한자로 되어 있어 많은 아쉬움이 남지만 그 자체로도 감흥을 받기에는 충분하다.

힘찬 충남과 문화도시 공주의 모습이 보여지는 공북루 글자체
▲ 힘쎈 충남과 문화도시 공주의 모습이 보여지는 공북루 글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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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성 '공북루' 유명문화재 제37호

공북루는 공산성의 북쪽 문루로 금강의 남쪽과 북쪽을 오가는 남북 통로의 주 출입문이다. 본래 공북루 자리에는 망북루가 있었는데 허물어져 터만 남아 있었다. 충청감영을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하면서 1603년(선조36)에 공산성을 크게 고쳐 쌓고, 이때 공북루와 그 옆에 월파당을 함께 지었다. 공북루의 아래쪽은 성으로 통하는 통로로, 위쪽은 마루를 만들어 금강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장소로 이용하였다. 문루 안에는 여려 편의 글과 시를 걸어 두었다.(문루: 문 위에 높은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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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북루 하부에서 바라본 금강과 반대편의 모습


▷저작물명: 1912년 충남 공주 공산성 공북루와 금강"
▷저작(권)자: 한국저작권위원회
▷출처: 2018년 공유저작물DB수집
▷이용조건: 한국저작권위원회의 "1912년 충남 공주 공산성 공북루와 금강"은 CC BY라이선스로 제공됩니다.
▷기여자: 부경근대사료연구소 김한근 소장

1912년, 그 해의 공북루는 역사의 가치를 간직한 보물상자처럼 문을 열었다. 백제의 향수가 가득한 소중한 역사적인 자료가 눈부시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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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잔뜩 낀 하늘아래 성곽과 금서루의 모습은 세상의 소음을 멈추게 하고, 오롯이 그 순간만을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공간으로 변신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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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궁 중심 건물지

백제 왕궁관련유적의 중심건물지군에 해당하는 곳이다. 동향사면의 자연구릉을 4단으로 구획하여 축대를 쌓고 건물을 배치하였다. 중심건물지는 중아에 길이 20m 너비 10m 내외의 넓은 마당지를 중심으로, 주변에 대형건물지가 'Γ'자상의 배치를 이루고 동쪽에 부속건물 3기가 있어 별도의 구획된 공간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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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성을 반겨주는 하늘의 헬기가 더욱 더 감동을 두배로 선사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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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서루를 따라 길게 시원하게 길게 늘어진 성곽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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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서루 오른쪽에서 바라본 전경

몇년 전에

몇 년 전에 촬영했던 아이의 모습은 뒤로 하고 공산성만 마음에 남겨 놓고 다음을 기약해 본다. 악어 같기도 하고 물고기 같기도 한 금서루의 실루엣으로 마음을 다잡아보고 다음의 앙리까르띠에 브레송을 생각하면서 발길을 돌린다.


공산성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5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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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 수정일 : 202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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