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57회 백제문화제[2011년 10월 1일 ~ 10월 9일 -9일간]개최 |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던 해상강국 백제가 10월 1일부터 공주에서의 개막식으로 시작되는 제 57회 백제문화제는 공주와 논산 부여일원에서 10월 9일까지 9일간에 걸쳐 화려한 문화 부활의 팡파레를 울립니다.
▲ ‘백제계백장군지묘(百濟階伯將軍之墓)’라 쓰인 비석의 비문 |
그러한 백제를 마지막으로 지키고자했던, 백제의 마지막을 함께 한 계백장군의 묘에서 웅장하고 화려한 상강국 백제의 문화가 이 땅에서 다시 크고 화려하게 부활하기를 기원했습니다.
▲ 계백장군묘소 가는 길가의 충절의 소나무 |
백제의 충절을 대표하는 백제의 계백장군, 그 장군의 묘소로 가는 길은 충과 절을 상징하는 곧게 자란 소나무가 절로 고개를 숙이게 합니다.
계백장군은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 때의 무신으로 달솔(達率:제2품)에 올랐으며 660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사비성(泗沘城) 공격에 5,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김유신(金庾信)이 거느리는 신라의 5만 군을 4번이나 물리쳤으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5천 결사와 함게 장렬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 국내외의 참배객이 끊이지 않는 계백장군의 묘 |
지금도 국내외에서 끊임없이 참배객이 이어지는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신예리에 있는 계백장군의 묘소는 아직도 정확하게 증명되지 않아 계백장군유적전승지 [ 階伯將軍遺蹟戰勝址 ] 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상태이며 1,256㎡의 면적에 묘지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충청남도 기념물 제74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나당 연합군과 백제간의 전쟁이 끝난 뒤 백제유민(百濟遺民)들이 장군의 시신을 거두어 가매장하였다고 구전되어오며, 특히 50년 전 묘가 노출되었을 때 철제무기가 나온 적도 있고, 주위의 지명이 충장산(忠莊山)·충훈산(忠勳山) 또는 수락산(首落山) 등으로 나타나고, 묘소일대를 ‘가장(假葬)골’이라고 부르는 등 지명도 특이한 점 등을 들어 그 신빙성을 높게 보고 있으며, 『선조실록(宣祖實錄)』과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에 계백장군을 비롯한 역대의 명장·충신의 묘를 보수하고 부근에서 짐승 먹이는 것을 금지한 내용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확실시 된다 하겠습니다.
▲ 5000결사 계백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충장사[忠將祠] 입구의 홍살문 |
묘소 근처에는 5000결사 계백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충장사[忠將祠]가 홍살문 너머에 있습니다.
▲ 5000결사 계백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충장사[忠將祠] |
충장사는 장군의 충의정신을 기리고 올바른 국가관과 호국정신을 함양하며 기리는 공간입니다. 할아버지를 따라 온 손자는 앞으로의 세상을 투철한 국가관과 호국정신으로 살아갈 듯 싶습니다.
▲ 충장사에 모셔진 계백장군의 영정 |
백제의 마지막을 함께 한 장군 계백은 죽기를 각오한 군사 5,000명을 이끌고 출전하면서, 이미 나라를 보전하기 어렵다는 것을 직감하고 '살아서 적의 노비(奴婢)가 됨은 차라리 죽음만 같지 못하다'하여 자기의 처자를 모두 죽여 비장한 결의를 보이고, 황산(黃山)벌에 이르러 세 진영을 설치하고 군사들에게 “옛날에 구천(句踐)은 5,000명의 군사로써 오(吳)나라 70만 대군을 쳐부쉈으니 오늘날 마땅히 각자가 있는 힘을 다하여 최후의 결판을 내자”며 맹세하고,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이끄는 5만의 군사를 맞아 네 차례나 그들을 격파하였으나 계백은 결국 전사하였고,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과 충곡서원(忠谷書院)에 그의 충절과 용맹함을 기리며 배향되어 있다고 합니다.
▲ 2010년 세계대백제전 주 행사장인 공주 예술마당 입구의 모습 |
멀리는 인도까지, 가까이는 일본과 중국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해상강국의 위상으 지녔던 백제, 고구려와 신라에 그리고 중국과 일본에까지 드높은 백제문화의 향기를 전했던 백제가 이제 새로운 부활을 꿈꾸며 2011 제 57차 백제 문화제를 개최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공주와 부여, 논산을 찾아 백제의 아름다운 문화를 향유하며 문화와 예술적 긍지를 드높이는 기회가 되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