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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채색 재실엔 연두빛 대추가 영글어가네

계룡시 모원재 신원재 염선재를 찾아서

2011.08.21(일) 잎싹(kji206@naver.com)

   

8년전 시로 승격한 계룡시는 계룡산의 좋은 정기를 가득 품고 있는 천혜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가지고 있는 청정지역이다. 계룡시에는 3개의 재실이 고스란히 보존이 잘 되고 있어 찾아 나선길, 가장먼저 모원재와 신원재를 찾아 갔다.  고속도로에서 계룡 IC에 접어들어 바로 우측 아담한 곳, 두마면 왕대 2리 마을은 "흙에서 살자" 라는 표지석이 꽤 토속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다.  

   

마을로 쉬엄 쉬엄 걸어서 들어 오면 꽤 오랜 세월을 지켜온듯 큰 정자나무와 충효정이라 적힌 정자를 만난다. 마을 분들이라도 지나칠려나 했는데 상당히 조용한 마을이다. 잠시 걸어서 마을 속으로 들어가면 눈에 들어오는 고택같은 재실을 만난다.  오토바이 한대가 서 있는걸 보아 다른 오래된 재실과 달리 사람이 기거하는 모양이다. 

   

황토 흙빛은 빛을 바래 분홍빛으로 보일 정도로 아늑한 느낌이며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드러내는듯  뚫어진 창호지가 세월을 가르킨다.  조금 열려 있는 대문으로 살짝 들어가 보았다.  

   

마당안에는 인기척이 없이 조용하였다. 고택은 충남문화재 자료 308호로 지정된 "모원재"(충남 계룡시 두마면 왕대리299)이다. 모원재는 안채로 조선 중기에 건립된 김국광(1415~1480)의 재실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에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우측2칸은 온돌방이고 좌측2칸은 우물마루를 깔아 사용하였으며 한옥재실로 본래 모습이 잘 보존 되어 있다. 재실은 무덤이나 사당옆에 있는  건물로 제사음식을 장만하고 음복, 망제를 하는 곳이다.   

   

그럼 김국광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김국광은 세종23년 (1441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으며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공을 세웠으며 "경국대전"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그후 예종때는 우의정, 성종때는 좌의정까지 올라 광산부원군 칭호까지 얻는 인물이다. 

   

모원재 돌담을 돌아 뒷편으로 가면 보통 고택과 다른점은 묘역과 연결되도록 큰 대문이 따로 나와 있다. 아마도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든 음식이나 식구들이 드나들기 위해 만든 뒷문인것 같다. 바로 옆에는 여름꽃 능소화가 마지막 꽃잎을 몇송이 남긴채 길가에 눈물 흐르듯이 뚝뚝 떨어져 있다.   

   

모원재 뒷문에서 돌아서면 바로 이렇게 큰 묘역이 있다. 묘역 입구에는 "좌의정김공묘역"이라 적혀 있으며  신도비각과 함께 묘역 일원이 상당한 규모을 보여주고 있었다. 의종공 묘역의 규모를 입증이라고 하듯이 조선왕조 수 많은 정승들 중에서  대제학 8명이 나온 집안이라 하니 새삼 감탄이 나왔다.   

   

모원재를 보고 난후 신원재를 보기 위해 좀더 깊숙이 마을안쪽으로 들어가야했다. 오가는 사람 하나없는 조용한 마을에서 여름이 깊어가는 모습을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긴 세월을 벼터온  담쟁이 덩굴이 유난히 무성한 집은 하얀 대문이라 눈에 더 띄었다. 덩굴 사이로 작게 적힌 "우리교회"의 소박한 글씨는 발걸음을 자연스럽게 마당으로 이끌었다.   

   
몇발자국 살포시 들어갔더니 마당에는 특이하게도 거북이가 십자가를 등에 업고 화단에 올려져 있었다. 아무렇게나 올려져 있지만 웬지 이유가 있을것 같아 그 모습에서슬그머니 의미를 찾아 보며 마당을 감상하였다.  
   

마을 한쪽에는 요즘 보기 드문 우물까지 볼 수 있었다. 제법 정돈이 잘 되어 있는 걸 보아 지금까지 사용을 하고 있는 살아있는 우물임을 알 수 있었다.  

   

5분정도 마을 안쪽으로 들어오면 김국광의 후손이며 조선 중기의 정치가이자 예학 사상가인 사계 김장생의 막내 아들인 김비의 재실을 만날 수 있다. 충남 문화재자료 제379호 지정되어 있으며 그의 부친 사계 김장생이 돌아가시자 신독재 김집과 그 형제들이 이곳에서 부친의 저서등을 정리, 집필 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김비는 당대 글씨로 이름을 떨쳐 문필가의 필원록에 오른 인물이다. 건물 전면에 "신원재" 현판이 걸려있으며 조선 중기의 전통적인 한식 목조 와가로 우측 2칸은 온돌방 좌측 2칸은 대청마루 구조이며 대체로 원형을 잘 보존되고 있으며  광산 김씨 묵옹공파 종중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  

   

모원재,신원재를 구경한후 왕대리 마을을 벗어나 금암동으로 오다보면  염선재 이정표를 만날수 있다. 좌측으로 구릉위를 조금 올라가면 고택분위기를 자아내는 염선재는  충남 문화재 제 316호로 사계 김장생의 부인인 순천 김씨의 재실로 1883년에 건립 되었다. 모원재, 신원재에 비하여 규모가 큰것은 원래 작은 규모의 제각이었는데  1913년 현재의 건물로 증축하였다고 한다.  

   

 문이 닫혀 있어 내부를 자세히 볼수 는 없었는데 아직도 주변이 정리중인걸 보니 문화재로 잘 관리, 보존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담넘어로 본 재실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건물로 정면에 "염선재기" 현판이 걸려있었다. 순천김씨는 김종서의 6대손 김수언의 딸로 김장생이 죽자 3년상을 마친 후 음식을 전혀 먹지 않고 1634년 12월에 자결하였다고 한다. 재실의 정문에 적혀있었던 "효열재" 의 의미를 알수 있을듯 하였다.

   
왁자지껄한 여행지가 아닌 무채색과 같은  재실을 돌아보고 오는 길, 유난히 길었던 올여름의 긴 우기와 상관없이 대추는 연두빛에서 차츰 엉글어 가고 있다. 한여름임에도 가을을 느끼게 하는 대추에서 올 가을은 하늘도 사람도 푸르른 시간이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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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 수정일 : 2019-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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