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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조선 최고의 명필 자암 김구를 만나다

중국인들이 죄다 사가 국내에 서체가 남지 않은 전설의 서예가

2021.03.14(일) 23:40:31 | 남준희 (이메일주소:skawnsgml29@hanmail.net
               	skawnsgml29@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모르는 명필(名筆)이 있다.
 
조선 4대 명필을 꼽으라면 조선 초기 안평체의 이용(안평대군), 중기 석봉체의 한호(석봉), 말기 추사체의 김정희, 그리고 인수체(仁壽體)의 대가 예산의 자암 김구 선생을 꼽는다. 인수체는 자암이 서울 인수방(仁壽坊)에 살았다 하여 붙여진 별명이다.
 
그의 글씨가 어느 정도였느냐면 중국 사람들이 그의 글씨를 다 사버려 현재 그가 남긴 글씨들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충남은 우리나라 최고의 명필을 2명이나 배출한 대단한 고장이다.
  
자암 김구는 어떤 사람일까.
 
예산 출신 자암 당대 최고의 불운(?)하게도 추사 김정희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한 부분이 있다. 추사가 워낙 유명해 잘 알려지지 않은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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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군 신암면사무소 근처에 가면 조선시대에 명필로 유명한 자암의 묘소가 남아 있다.
 
신암면사무소 근처 대로변에 자암의 묘소를 가리키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어 자암의 흔적을 찾아가기가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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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로변에서 5분만 걸어가면 아주 낮은 구릉에 자암의 묘소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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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암 후손들과 종친회에서 세운 묘지석이 묘소 앞에 있다.
 
자암은 1519년 홍문관부제학이 되었지만 같은 해에 11월 남곤 등 훈구세력이 일으킨 기묘사화로 조광조·김정 등과 함께 투옥되어 개령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남해로 옮겨졌다. 1533년 풀려나 고향인 예산에 돌아왔지만 이듬해 죽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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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암의 일생에 대해 써 놓은 표지판도 있다.
 
자암은 마지막 유배지는 남해의 노도라는 곳이었는데, 섬 이름은 옛날 이곳에서 배의 노를 많이 생산했다고 하여 노도(櫓島)라 불리게 된 곳이다. 그래서 현재 남해 노도에는 유배문학 테마파크가 조성되어 있고 화전별곡을 쓴 자암 김구, 남해문견록의 저자 후송 유의양 등을 기리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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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암의 묘소와 당시에 세운 묘지석인데, 오랜 시간을 견뎌온 풍화 탓에 많이 패이고 흐리지만 당대 명필의 위엄을 말하는 듯 당당히 묘지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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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석 옆에는 문인석이 세워져 있다.

악정은 고려시대에 이어 조선시대 성균관에까지 두었던 음악관계 벼슬인데 이들의 직분은 음악을 이론적으로 연구하는 것이었다. 악정은 임금이 친히 제사에 참석하는 친사(親祠)에 반드시 참석하였고 조선 건국 당시에는 문무백관을 새로 정할 때, 정4품의 악정 2인을 성균관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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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앞 오른쪽에는 그의 뜻을 기리는 정려도 세워져 있다.

자암은 남해로 유배되어 갔을 때 그곳의 뛰어난 경치와 향촌의 인물들과 어울려 풍류를 즐기던 정서와 감회를 노래한 화전별곡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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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려에 붙여져 있는 현판이 유배지에서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듯하다. 세월은 지나갔고 이제 묘소만이 그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지만 유배지에서도 멋과 풍류를 잊지 않았던 자암이었다.
 
남해보통 유배라고 하면 안 좋다고 생각하겠지만 김구선생은 화전별곡을 통해 토속적 남해유배지에서 역사문화 사적을 우리는 어떤 자세로 이해하고 그 시대적 사상과 이념의 가치관을 얼마나 수용 계승 발전하느냐 하는 것은 남해의 문화발전에 중대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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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암의 묘소를 보고 나오면 대로변 주차장에 대형 화전별곡과 화강암 비석이 세워져 있다. 화전별곡은 자암이 남해에서 유배 중에 쓴 내용 그대로 옮겨 놓았고, 화강암 비석은 자암의 기념비와 당시 아들, 현감 등을 추억하는 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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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암의 글씨는 유일하게 국립 중앙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인터넷에서 검색을 하면 이렇게 자암의 서체를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글씨 파일을 공개하고 있다.
  
서체에 대해 문외한이라 이 글씨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으나 엄청난 내공이 느껴지는 글씨체인 건 알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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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곳은 공주에 있는 충남역사박물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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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가면 자암 김구의 벼루(왼쪽)를 전시해 놓고 있어서 쉽게 감상할 수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에 널리 유행한 일원연의 형식으로 만들어져 벼루에 매화와 대나무, 두루미와 수달, 산수를 배경으로 낚시를 드리운 선인 등을 조각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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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루에는 '조선위원화초석산수매죽일월연(朝鮮渭原花草石山水梅竹日月)'이라 씌어 있는데 이것은 중종이 자암에게 하사하였다고 전해지는 벼루이다. 재질은 평안북도 위원군 압록강 수중에서 채집된 돌이라고 한다. 현재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성균관에서 일하다가 한밤중에 책 읽는 소리를 듣고 임금이 찾아와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는 일화도 전해지는 조선 최고의 명필, 너무 이른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것이 두고 두고 아쉬운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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