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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서거 567주년 김종서 선생 추모제

공주시 의당면 월곡리 생가터 유허지에서 열려

2020.10.13(화) 14:45:19 | 계룡도령춘월 (이메일주소:mhdc@tistory.com
               	mhdc@tistory.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서거567주년김종서선생추모제 1

지난 10일 충익공 절재 김종서 선생 서거 567주년 추모제가 공주시 의당면 월곡리 생가터 김종서 유허지에서 처음으로 열려 계룡도령이 다녀왔습니다.

서거567주년김종서선생추모제 2
 
식전 공연을 펼치고 있는 천태산풍물단의 모습인데요, 제1회 충익공 절재 김종서 선생 추모제는 코로나19 상황에 맞게 철저한 방역 수칙을 지키며 진행되었습니다. 발열 체크는 물론 참가자 모두의 연락처와 체온을 기록하였고 손소독을 하여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서거 567주년 충익공절재김종서선생 추모제
-일시: 2020.10.10. 10시
-장소: 절재 김종서 장군 생가터
-주최: 공주시
-주관: 청정 의당을 지키는 사람들
-참석자: 종친, 각계 인사, 주민 등
 
서거567주년김종서선생추모제 3
 
1383년 충남 공주시 의당면 월곡리에서 출생한 김종서(金宗瑞, 1383∼1453년)의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절재(節齋)이다. 지평 김태영(金台泳)이 조부이고, 아버지 도총제(都摠制) 김수와 어머니 대사헌 배규(裵規)의 딸 사이에서 난 3남 중 둘째로 단종 때 충신이다.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한 뒤 함길도 도절제사 되어 1434년(세종 1) 함경도 지역에서 여진족을 몰아내고 육진을 개척하여 국토 확장의 위업을 이룩한 인물이다. 문종 때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제수되어 어린 단종을 보필하였으나 수양대군이 제6대 왕 단종(재위 1452∼1455)의 보좌 세력들을 살해·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사건인 ‘계유정난’ 당시 수양대군에 의해 장군과 두 아들이 모두 죽임을 당한 비운의 장수이다. 김종서는 또 <고려사>, <고려사절요>, <세종실록> 등을 편찬한 뛰어난 문필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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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관급제집사분방(獻官及諸執事分榜)
 -제전위원장(祭典委員長): 청정의당을 지키는 사람들 대표 박한규
 -초헌관(初獻官): 한기두 의당면장
 -아헌관(亞獻官): 이충렬 김종서장군문화제추진위원장
 -종헌관(終獻官): 박종옥 월곡리 노인회장
 -집례(執禮): 고주환
 -해설(解說): 김학출
 -대축(大祝): 서이석
 -좌집사(左執事): 홍명재
 -우집사(右執事): 박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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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례 고주환에 따라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시작으로 추모제는 시작되었습니다. '청정의당을 지키는 사람들' 대표 박한규의 충익공절재김종서선생 서거567주년 추모제 식사와 내·외빈의 인사가 이어졌습니다.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 민초 필부필부의 가슴에 있다. 오늘 우리가 절재 김종서 선생이 돌아가신 지 567주년을 맞이하여 의당면 마을주민이 주축이 되어 추모제를 올릴 수 있던 것은, 옳고 그름의 진실이 우리 민초의 가슴에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수백 년이 지나도록 정승집터라 보존한 것도, 의당초등학교 설립(1927) 초부터 역사교육자료로 활용한 것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94호로 지정된 것도, 오늘 여기 의당면 민초의 가슴에 면면히 이어진 것도, 이분이 행한 절의가 만고에 표준이 됨을 알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는 인간의 역사이며 도덕의 역사이며 정의를 표준으로 항상 새롭게 평가됨을, 우리는 오늘의 이 추모제를 통하여 이 시대의 위정자와 관리에게 감계를 내리며, 아울러 이 시대 민초 또한 ‘오늘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것이 역사적 사명임’을 자각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절재 김종서는 이에 비견할 지조와 절개, 막중한 책무를 당했으나, 시류에 영합한 무리에게 농락당하여 마침내 자신과 일족이 죽임을 당하고 단종도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으니, 오랜 역사에서 영웅이 눈물을 뿌릴 일이다. 그러나 어찌 역사에서 성공한 자가 옳고 실패한 자가 그른 것인가? 오늘 이 행사는 비록 실패했지만, 그분이 행하려 한 절의와 충을 되새겨 다시는 불의한 무리들이 악행을 저지를 수 없는 역사의 표준을 세우고 선양하기 위함이다.'

월암리마을회 사무장 김동철은 이렇게 추모제의 변을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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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 서거 후 300년이 지난 제21대 왕 영조대에 복권되면서 충의의 상징적 인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1691년(숙종 17) 단종의 추복(追復)이 단행된 데 힘입어 300년이 지난 1746년 제21대 왕 영조대에 신원(伸寃)되어 복직되었고, 1747년(영조 23) 1월에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金承珪)·김승벽(金承壁)을 함께 복관시킬 것을 처음 제안하였고, 11월에는 김승규의 정려를 주장하여 관철되었으며 1758년(영조 34)에 영조는 시장(諡狀)을 준비할 것 없이 시호를 내리라고 명하였고. 1786년(정조 10) 백악산(白岳山) 기슭에서 우연히 발견된 옥함(玉函)에서 김종서의 위패가 발견된 것이 계기가 되어 그의 위패를 불천위(不遷位)할 것을 명하였으며, 1791년(정조 15) 장릉 배식단(配食壇)에 배향되어 1804년(순조 4) 2월에는 김종서가 정려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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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에 따라 진행된 제례에 이어 공주의 자랑인 경기민요 이수자 명인의 공주아리랑, 명창 남은혜의 김종서(金宗瑞) 작 한글 시조 2편 중 1편에 곡을 창으로 열연하여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장백산(長白山)에 기(旗)를 꽂고 두만강에 말을 씻겨
   썩은 저 선비야 우리 아니 사나희냐
   어떻다 인각화상(麟閣畵像)에 누가 먼저 걸리리요" 
 
'백두산에다 군기를 꽂아놓고 두만강에 말을 씻기곤 하니 장하지 아니한가. 궁궐에서 남을 시기하고 모함하는 선비들아, 우리의 이 사나이다운 모습을 보아라. 나라에 공헌이 많은 사람의 화상을 그려 거는 능연각(凌然閣)에 누구의 얼굴을 걸어야 하겠는가'"라며 탄식한 시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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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바리톤 한종동의 노래로 김종서의 시조에 최성현이 곡을 붙인 '김종서의 기개'가 이어졌습니다.

  "삭품(朔風)은 나모 끝에 불고 명월(明月)은 눈속에 찬데,
   만리변성(萬里邊城)에 일장검(一長劍) 짚고 서서
   긴 파람 큰 한 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현대어로 옮기자면, '몰아치는 북풍은 앙상한 나뭇가지를 스치고, 밝은 달은 눈으로 덮인 산과 들을 비춰 싸늘하기 이를 데 없는데, 멀리 떨어져 있는 변방(국경) 성루에서 긴 칼을 힘있게 짚고 서서, 길게 휘파람 불며 큰 소리로 호통을 치니,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소리에 감히 대적하는 것이 없구나.'라는 내용의 김종서 서생의 시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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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석자의 단체 기념 사진을 끝으로 공주시 의당면 월곡리 생가터 유허지에서 열린 서거 567주년 김종서 선생 추모제는 모든 일정을 마쳤습니다. 코로나19 영향으로 식사를 함께하지 못한 채 도시락으로 대체하는 등 진행에 만반의 정성을 기울인 모습은 앞으로 계속 이어져 나갈 김종서 선생 추모제의 미래가 밝은 듯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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